크눌프

출간일 2004년 11월 20일

<크눌프>는 총 3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과 ‘초봄’,'종말’ 인데 책에는 ‘초봄’이 첫 순서로 되어있다. 그 두 이야기는 순서가 바뀌어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하다. 크눌프는 지금까지 다뤄왔던 헤세의 작품 주인공들의 형제격이기도 하고 헤세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크눌프는 한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며 사람과 자연을 아끼고 사랑한다. 그의 친구들은 크눌프의 방랑벽을 염려스럽고 우습게 생각하면서도 자유로운 크눌프의 삶에 부러움을 느낀다. 젊은 시절 크눌프는 수려한 외모와 시인의 면모, 화려한 휘파람 솜씨 등으로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같은 행동이라도 크눌프가 하면 더 멋있어 보이고, 깔끔하고 민첩한 행동거지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런 크눌프에게도 사람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었는데, 사랑했던 여인 프란치스카의 배신이 그것이었다. 기술자나 노동자같은 제대로 된 인간이 좋다는 그녀의 말에, 우등생으로 인정받던 라틴어학교를 일부러 퇴학당하고 독일어 학교를 다니게 되었던 크눌프. 라틴어 학교를 관두고 노동자같은 사람이 된다면 애인이 되주겠다는 프란치스카의 말을 믿었는데, 프란치스카는 다른 기계 견습공과 사귀고 크눌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 후로 크눌프는 더이상 사람의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약속을 가지고 자신을 구속하는 삶도 살지 않았다. 말년의 크눌프는, 자신은 자유와 아름다움을 모두 느끼고 살아왔지만 결국에는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심한 회의감에 빠진다. 마지막에 하느님과 대화하며 살아왔던 삶의 의미를 깨달은 크눌프는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나 역시 크눌프의 삶이 부러웠다. 안정적인 시민의 삶도 훌륭하지만 이렇게 온전히 자유에 몸을 맡기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물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일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쫓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삶이다. 미래에 대한 압박과 근심이 커질때에는 특히나 심한 갈망을 느낀다. 그게 현실도피인지 삶의 재발견인지 판단하는 건 나 자신으로 충분할 것이다.

 

‘작품 소개’의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헤세의 편지글 부분을 옮겨적어본다.

 

 

유행하는 견해와는 달리 나는 작가의 과제가 자신의 독자에게 인생과 인간에 대한 규범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거나, 그가 전능하고 권위적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작가는 자신을 매혹시키는 것을 묘사하는 자라고 생각해. 크눌프와 같은 인물들은 나에겐 매우 매혹적이네. 그들은 <유용하지는> 않지만 많은 유용한 사람들처럼 해를 끼치지는 않지. 그들을 심판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닐세.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크눌프와 같이 재능있고 생명력 충만한 사람들이 우리의 세계 안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크눌프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또한 내가 독자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 연약한 사람들, 쓸모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일세. 

 

-1954년 1월 에른스트 모르겐탈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