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예스24와 민음사에서 주최하는 고전강의, 밀란쿤데라편을 듣고 와서…

 

이틀 동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을 읽었다.

 

대학시절 읽었던 책인데….

 

거이 20년만에 읽는 것 같다.

 

그때 참 감동있게 읽었는데..

 

지금 읽으니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그동안 너무 스토리 위주의 스릴러 소설에 길들여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힌 것은 고전강의를 들었던 이야기들이 소설을 읽는 맥락을 잡아 주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강의를 듣지 않고 읽었다면 지금의 내 독서능력으로는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이 책의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라는 삼각관계로 구성되어있다. 사비나를 좋아하는  프란츠까지 포함하면 사각관계?인가…

 

 

 

프라하의 봄이란 당시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체코의 민주화운동이다.

 

사실 이것을 민주화 운동으로 불러도 되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민주화운동과는 다른 성격이었다고 생각한다.

 

얼마 후 소련군이 이를 진압하고 지식인층 50만명을 숙청한 사건으로 알고 있다.

 

그때 지도자를 두부체크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둡체크라고 발음한다.

 

 

 

이런 사건을 배경으로 에로틱한 우정을 꿈꾸며 200여명의 여성과 잠자리를 한 토마시라는 주인공과…

 

그를 사랑한 테레자…

 

토마시와의 에로틱한 우정 관계에 있는 사비나…

 

그리고 사비나를 사랑한 프란츠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사실 밀란쿤데라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아니다.

 

밀란쿤데라에게 있어서 소설의 중심은 스토리가 아니라 인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 인식이란 쿤데라가 이해하는 실존적  인간관이다.

 

 

 

따라서 위의 인물들의 사건들과 배경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소수의 분량을 차지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역사적인 배경이나, 인물들의 관계가 아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인간관이다.

 

(너무 거창한 단어들이다. 저자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들일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형이상학적이거나 관념적인 이론들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느낀다. 저자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실존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실존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방식도 형이상학적인고 관념적이다. 저자가  내가 하는 소리를 들으면 아마 욕을 할 것 같다…ㅠㅠ)

 

 

 

저자는 이 책의 시작부터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다룬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P9)”

 

 

 

저자에게 세계는 영원히 반복되는 세상과 한 번뿐인 일회적인 세상으로 나뉜다. 저자에게 있어서 전자의 세상은 그냥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이고, 후자의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상이다. 그래서 저자와 저자가 창조한 소설 속의 인물들이 사는 세상은 가벼운 세상이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고, 나는 앞  장의 뜻을 밝히기 위해 이를 언급하고자 한다.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 번 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또한 지구에서 보낸 전쟁과  거기에서 익힌 경험을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미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가지고 세  번째로 태어나는 또 다른 행성이 존재할 수 도 있다.

 

  그리고 인류가 매 번 성숙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토마시의  생각이다.

 

  지구(1번 행성, 미 체험 행성)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에 대해서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순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난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P359-36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무거움을 지향한다.

 

토마시와 사비나는 이런 것들을 못 견뎌하는 인물이고…

 

아마 밀란쿤데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밀란 쿤데라가 이런 것들을 비웃기 위해 등장시키는 것이 섹스와 배설이다.

 

저자는 인간이 먹고 싸는 자연스러운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종교나 철학은 이런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을 ‘키치’(19세기 이후부터 등장한 문화비평적인 단어?)라고 한다.

 

실제적인 인간관과는 다른 이상적인 인간관이다.

 

토마시가 속한 체코의 공산주의는 이것을 꿈꾼다.

 

그래서 토마시와 사비나는 이런 것에 반대를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반대해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키치를 꿈꾼다.

 

그래서 토마시와 사비나는 이것도 반대한다.

 

나는 이것이 바로 저자의 정치관이자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 실존적인 인간을 주장한다.

 

인간은 먹고, 싸고, 선택을 하고, 실수를 하는 가벼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이런 가벼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 소설이 아이러니하고 어렵다.

 

저자는 인간과 세상이 가볍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거움을 주장하는 세상, 사상, 종교,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런데 또한 이 가벼움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런 생각과 사상들이 소설 곳곳에 녹아져 있다.

 

 

 

소설은 이미 초반부분에 토마시와 테레자가 교통 사고로 죽는다고 언급하고 있다.

 

스토리상 이야기는 이미 초반부에 끝이 난 것이다.

 

그 다음은 각 자의 인물들이 깨닫는 세상과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국 이 책에은 체코의 역사적 사건이나 남년간의 사랑이나 질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움의 세상, 우연으로 이루어진 세상, 그리고 그 세상에서 힘들어 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책의 결론,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결론은 나도  모르겠다.

 

아마 밀란쿤데라의 다른 책들을 읽으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