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쿤데라의 소설론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에세이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내나름대로는 인문으로 분류한다.

 

수필이라고 하기엔 다루는 주제가 너무 전문화 되어 있지 않은가?

 

아무튼 마그리트의 저 표지하며, 쿤데라의 소설론이라고 하는 소개까지 한껏 기대를 하고 책을 집어든다.

 

거기다, 제목이 커튼인 이유가

소설가는 삶의 본질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찢어서 독자들에게 그 본질을 드러내게 해야 한다!

아 얼마나 멋진 말인가?

소설가는 도대체 왜 소설을 쓰는가에 대한 가장 훌륭한 답이며

반대로 독자들은 도대체 왜 소설을 읽는가에 대한 가장 공감가는 답이 아닌가?

 

헌데 이런 기대감과는 다르게 책을 읽기는 수월하지 않다.

일단 가독성이 확 떨어진다. 주제 자체도 난해하고, 쿤데라 선생께서 쉽게 쉽게 글을 쓰지도 않았겠지만

무엇보다도 문제는 번역이다.

한번 읽어서는 “어라? 이게 무슨 소리지?” 하는 소리가 여러번 나오게 된다.

 

한번 보자

 

필딩이 소설의 형식에 대하여 전적인 자유를 주장한다고 할 때, 그는 우선 소설의 의미와 본질을 구성한다고 주장되는 행동, 몸짓, 말의 인과 관계, 즉 영국인들의 용어로 말하자면 ‘스토리(story)’로 소설이 환원되기를 거부하고자 한 것이다. ‘스토리’의 절대주의적 권력에 항거하여 필딩은 특히 “그가 원하는 곳에서, 그가 원할 때” 자신의 주석과 성찰의 개입에 의하여, 달리 말하자면 여담(digressions)에 의하여, 서술을 방해할 권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필딩 역시 마치 ‘스토리’가 구성의 통일성을 보증해 주고, 시작과 끝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토애인 것처럼 ‘스토리’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필딩은 결혼이라는 ‘해피 앤드’의 공을 울리면서 [톰 존스]를 끝냈다. (아이러니컬한 미소를 은밀하게 띠면서였겠지만)    -23P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하나 외국어를 읽듯 번역하며 읽어야 어렴풋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이런 번역에 닮고 있는 내용조차 생소하니 좀처럼 진도가 나가겠는가?

 

거기다가 프랑스에 사는 쿤데라옹께서는 익숙하지만 우리에겐 익숙하지 못한 예들이 반복되다 보니

이런 기본적 지식없이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건지 미로속에 갇힌 기분이 들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이 읽기 불편한 책을 다 읽고 별을 네개나 박을 수 있었던건

소설은 도대체 왜 읽어야 하는가? 혹은 소설가는 왜 소설을 쓰는가?

에 대한 몇가지 답을 얻을 수 있었고 또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연속성, 역사의 가치, 삶의 밀도에 대한 고찰, 젊음과 늙음, 사물의 핵심, 기억과 망각 등등

다양한 주제로 다양하게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기에

훗날 다시금 읽어서 소화해 봐야겠다는 흥미와 관심을 이끌어내기엔 좋은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