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블로그에 쓴 리뷰입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다. 하지만 쉽게 읽을만한 책은 아니다. 그저 주인공의 감정을 따라가며 감동받거나, 감탄할 정도의 책은 아니라는 것이겠지

작년 세계문학전집에 지름신이 접신하여 사들인 몇십권의 책들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 지름신 덕분에 민음사 북클럽 회원에 2년 내리 가입했고, 책장에는 아직도 읽지 못한 세계문학전집이 수두룩하며, 계속 수집품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그래도 뭐 언젠가는 다 읽겠지… 출판사에서 선별한 훌륭한 책들이고, 나역시 나름 고민하고, 찾아보며 고른 책들이니까…

 

여하튼 세계문학전집을 읽다보면 “이야 이건 역시 정말 대단하다!” – 예를들어 1984, 인간실격, 이방인 – 라고 할한게 있고, 어떤건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고도를 기다리며 -라고 할만한 난해한 것들이 있으며, “그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이정도는 훌륭하지~” -구운몽, 목요일이었던 남자- 싶은것들도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중 단연 첫번째인 이거 정말 대단하다가 되겠다.

 

일단 제목에서 빛이난다. 이보다 멋진 제목을 또 찾을 수 있겠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니… 이 얼마나 철학적이면서도 모든 것을 함축하고, 거기다 미학적인 제목이란 말인가?

 

소설속엔 네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중심이 되는건 토마시와 테레자 커플이며, 다른 둘은 토마시의 내연녀 사비나 그리고 사비나의 또다른 남자인 프란츠가 되겠다. 토마시에게 테레자는 무거움이고, 사비나는 가벼움이다.

 

작가님은 주인공들이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였음을 애초에 공개하고 전지적시점에서 그들의 속마음까지 낯낯이 밝히며 , 나아가 뒤엔 애완견의 속마음도 속속 알려주신다. 이래서 등장인물들이 어떤 감정일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요는 그들의 삶은 왜? 그러한가이다.

 

배경은 그 유명한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의 체코, 망명 스위스, 다시 돌아온 체코

 

1. 토마시와 테레자는 우연이 겹쳐서 만나게 되었고, 역사의 무거움에 눌려버렸다. 우연은 무엇이며? 한번한 결정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2. 테레자는 집착과 질투로 바람둥이 토마시를 사랑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아무 대가나 변화를 바라지 않는 애완견에 대한 사랑이 오히려 진정한 사랑일까?

 

3. 사비나는 무거움을 벗어나 한없이 가벼워 지려고 했고 결국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놓인다. 그녀는 항상 반 키치를 외쳤지만 정말 키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녀의 적은 공산주의나 제국주의가 아니라 키치인 것인가?

 

4. 프란츠는 사비나의 정신을 동경하며, 자신의 키치를 쫓아 대장정에 나서지만 과연 그 대장정이 똥보다 무거운 것일까? 대장정은 해프닝의 연속이며, 한없이 가벼워 보일 뿐이다.

 

 

뭐 아무튼 책을 읽게된 지금이 대선을 코앞에 두고있는 상황인지라 역사의 무거움과 개인의 가벼움이 한층 더 깊게 느껴지는 수 밖에 없다.

 

토마시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동침하는 줄 몰랐지만 사태의 진상을 알자 자신이 결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그는 자기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던 것이다. 토마시는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악스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무지탓에 이나라는 향후 몇 세기 동안 자유를 상실했는데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리칠 수 있나요? – 276p-

 

마치 그 시대엔 어쩔 수 없었어 라고 말하는 친일파들이 떠오르는 순간이며, 현재도 진행되는 지난날의 열정적이던 운동권 학생이 이제는 노회한 국회의원이 부패한 보수가 되어 반대편에 서있는 모습, 혹은 자신의 이론과 배치되는 말도 안되는 정책에 찬성하는 교수들, 그리고 온갖 거짓과 눈가리고 아웅하는 언론들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1968년 체코는 현재의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없이 반복되어 왔고, 앞으로도 반복될 역사 그러니 일본의 지배는 우리를 문명화시켰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 버젓이 떵떵거리고 있겠고…

 

하지만 1910년의 조선과 1968년의 체코와 2012년의 대한민국은 또 다르다.

 

역사란 영원한 회귀를 생각하게 할 수도 있고, 반면 한번 흘러감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느쪽은 한없이 무겁고, 반대는 한없이 가볍다. 반면 그 속의 개인은 한없이 가볍고, 반대는 한없이 무거울 수도 있다. 영원히 회귀되는 역사란 너무나 무겁지만, 그 무수히 반복되는 프랑스 혁명속의 로베스피에르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쿤데라 선생게선 여기서 또 의문을 던진다. 그럼 가벼운것과 무거운것 중 어떤것이 긍정적인데?

 

아 어렵다. 나 스스로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은데, 또 한편으로는 어떤 짐이 나를 누르고 또 그 무게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기도 하다. 어느것이 긍정적이고 부정적이라기 보단 그냥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 어디쯤에서 삶의 짐을 어깨에 떡하니 걸친채 오늘도 가벼워짐을 꿈꿀 수 밖에…

 

그래도 한없이 가벼운듯한 개인이 모여 한없이 무거울 역사를 만드는건 아닌가? 우주의 방대함이나 지구 전체의 엄청나게 긴 시간의 관점에서야 그것또한 한없이 가벼울 지라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가벼운 개인들이 모여 무거워진 의지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역사를 끌고 갈 것을 기대하는건 아닌가?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역사도,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 뿐이다. 토마시의 인생처럼 그 역시 두 번째 수정 기회 없이 어느날 완료될 것이다. – P343

 

우리의 결정도 한 번 뿐이고, 그 결정이 오른 결정이 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최악이 아닌 결정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최악의 길을 우리는 미리 예상할 정도의 통찰력은 갖고 있길 바라본다. 쿤데라 선생께선 키치란 존재와 망각사이의 환승역이라 했거늘, 반키치를 추구하지만 결국 키치 안에 갖혀 있는건 아닌지 한번 되돌아 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