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성찰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출간일 2000년 12월 2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새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 한다.

 

 

<데미안>의 설정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을 다루는 현실이면서, 동시에 꿈 속을 헤매는 것 같은 비현실성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사는 곳을 ‘세계’로 인식한다. 세계는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로 나누어져 있다. 싱클레어는 선의 세계에 살기를 바라지만 악의 대표적인 상징인물, 프란츠 크로머로 인해서 점점 악의 세계에 물들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크로머와 만나며 괴롭힘을 당하며 정신적착란 증세까지 일으킬 때, 기적처럼 하나의 인물이 나타나 구원해준다. 그 인물이 바로 막스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보다 몇 살 위의 아이로, 아이같지 않은 의젓함과 단호함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날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다가와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이후로 정말 크로머는 싱클레어를 부르지 않았고, 오히려 마주치면 도망가기까지 했다. 싱클레어는 놀랍고 데미안에게 고마운 한편, 어떠한 불신감과 불안함으로 데미안에게 참된 참회를 하지는 못했다. 당시의 싱클레어에게는 너무나고 파격적이고 자극적이었던 데미안의 사상들은 싱클레어에게 불안감을 심어줬다. 데미안처럼 자립적이 되기에 싱클레어는 아직 너무 의존적이었고 ‘선의 세계’에서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데미안이 말하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끝까지 중요한 상징이 된다. 여기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은 용기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람을 의미한다. 데미안은 카인이 악인도 영웅도 아니라고 말한다. 카인은 그저 용기와 대성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겐 무서운 존재였을 뿐이다. 카인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카인의 이마에 ‘표적’을 붙여서 하나의 변명과 이야기를 꾸며놓았다는 것이다. 왜 그를 없애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에 ‘우리가 겁쟁이라서’가 아닌 ’하느님이 그에게 표적을 붙여주셨기 때문에’라는 자신들에게 편한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서.

 

나중에서야 나오는 말이지만,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보자마자 그의 이마에서 ‘카인의 표적’을 보았다. 그리고 그 표적대로 싱클레어는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분명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된다.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길과 가야할 길에 대한 시도와 암시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뇌하며 진정한 자신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일반의 ‘아벨’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싱클레어가 만난 친구이자 스승인 피스토리우스는 말했다. ‘우리의 내면에서 영혼이 바라고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금지된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도덕적이거나 근엄한 생각들로 자신의 본능을 죄스러운 것이라 생각하게 되면 그건 현실을 외면하는 것과 같다.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함시키는 일종의 신’이다.

 

우리 새다. 신이면서 악마인 그것을 향해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깨고 날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떻게 들으면 너무나 모호하고 비현실적이고 일종의 사이비교의 교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그 어떤 외부의 판단도 개인 스스로의 본능과 이상을 ‘도덕적’이고 ‘선’한 잣대로 판단지을 수 없다. 그것에 좌지우지 되서도 안된다.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그 무언가를 추구하며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는 것. 데미안은 그 일을 행하는 용기의 상징이 될 수 있고, 싱클레어의 정신적인 우상이기도 하다. 그러한 데미안도 어머니 에바부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절대적인 필연일 수 있다. 처음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게 되서 구원을 받은 것 또한 절대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데미안이 마지막에 정말로 죽었는가 아닌가에 대하여 말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싱클레어는 헤르만 헤세와 동일시 되지만 데미안은 소설속에서만 존재할 수 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실제로든 소설속에서든 죽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의 생각과 가르침이 오랜 세월동안 끊임없는 사랑을 받으며 전해올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할 점이다.

 

<데미안>을 읽는 것은 한없이 기쁘면서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는 나의 소리에 얼마만큼 귀를 기울였으며, 그것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였는가? 부모님이나 선생님, 혹은 친구나 주변 사람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걱정하고 맞춰가기 위해 자신을 죽이고, 마음속에는 설명 할 수 없는 공허와 허무만이 남겨졌다.

 

삶을 살면서 과연 어떤 방식이 옳고 그른지는 아마 신이라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나의 인생을 판단할 수 있는 건 나의 내면의 목소리 밖에 없다. 어느 순간이건 그 목소리는 무의식에서 튀어나와 의식에 신호를 보낸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애써 무시해버렸을 떄, 그 결과는 나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안겨주었는가. 생각해보면 그런 일은 항상 있었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나를 나로써 있을 수 있게 도와준다. 헤세는 <꿈의 해석>을 읽고 영감을 받아 <데미안>을 썼다고 한다. 꿈이 주는 암시와 무의식적인 여러 상징들은 거기서 비롯됐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무의식 영역을 설명함으로써 인간 내면 성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프로이트는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 하는 새삼스런 생각을, <데미안>에게서 받은 감동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존경을 담아서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