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실험적이고 점잖치못한 고전소설은 처음이다. 문체부터가 소위 말하는 ‘대화체’로, “~있을 거야”,”여러분의 겸손한 화자는…” 같이 독자에게 말을 거는 듯한 투다. 게다가 반말. 당대에도 실험적인 문제적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시대에 읽어도 그런 느낌이 든다는 건 그 자체로도 대단한 것 같다.

 

주인공 알렉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불량청소년이다. 세명의 친구들과 밤거리를 쏘다니며 온갖 나쁜짓은 다 하고 다닌다. 마약을 하고 가게를 터는 건 예사고, 길가는 할아버지를 책을 들고 있다는 이유로 죽기직전까지 패고, 가정집에 갑자기 쳐들어가서 이유없는 폭력을 휘두르며 성폭행까지 서슴지않는다. 알렉스와 친구들이 쳐들어간 그 집은 ‘집(home)’이라는 표지판이 붙은 어느 작가가 사는 집이었다. 그 작가는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있었는데, 알렉스는 그 제목을 보고 비웃으며 원고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폭력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도 아무런 죄책감이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 알렉스. 클래식음악을 좋아하는 의외의 일면도 갖고 있지만 그런 음악을 들으면서 폭력의 환상만 더 키운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와 같이 친구들과 어떤 집을 털러 들어가는데, 그 집의 할머니와 몸싸움을 벌이던 중에 알렉스는 할머니를 세게 때리게 된다. 경찰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도망가려는데 친구들은 알렉스를 배신하고 자기들끼리만 도망간다. 경찰서에 끌려가서 그 할머니가 병원에서 사망했음을 알게된다.

 

결국 교도소에 가게 되는 알렉스. 거기서 인생을 바꿔놓을 큰 사건이 일어난다. 악한 사람을 억지로 착하게 만드는 인체실험의 첫번째 희생자가 된 것이다. 약물주사 후에 의자에 묶여서 억지로 온갖 폭력영화를 보게 하는 비인간적인 2주간의 실험을 마친후에 알렉스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폭행하려는 상상을 하면 곧바로 역겨움이 올라오면서 견딜 수 없이 괴로워지는 것이다. 상대방이 아무리 자신을 때리고 모욕해도 알렉스는 상대방을 때릴 수도, 욕할 수 조차 없다. 그 사람에게 최대한 잘해주고 착한 소리를 해야 비로소 나의 아픔이 줄어드는 것이다. 정부는 의도했던 대로 ‘착한’아이가 된 실험체 알렉스를 보고 만족스러워한다. 교도소 신부는 그런 알렉스를 보고 “저 애에게는 진정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라고 하지만 실험을 주도한 박사는 “그건 사소한 부분”이라며 “우리는 범죄를 줄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고 한다.

 

사회로 내보내진 알렉스는 예전에 자기가 무시했지만 이젠 경찰이 된 두명의 깡패에게 얻어맞고 어느 집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 집은 예전에 알렉스와 친구들이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던 ”집(home)”이었다. 그 집에 살았던 작가는 <시계태엽 오렌지>를 책으로 발간했다. 그리고 같이 살던 부인은 알렉스와 친구들의 강간과 폭력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아직 그때의 깡패가 알렉스인지 모르는 작가는 정부의 실험체가 된 알렉스를 동정하고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도와주겠다고 한다. “이 사악하고 교활한 현 정부가 다음 번 선거에서 다시는 복귀하지 못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반정부 단체 사람들에게 이끌려 알렉스는 어떤 방에서 지내게되는데, 옆방에서 들리는 클래식 음악 소리에 괴로움을 토하다가(실험당시에 보여준 영화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와서 그 좋아하던 클래식 음악도 들을 수 없는 몸이 됐다) 자살을 결심하고 창문에서 뛰어내린다.

 

그러나 그닥 높지 않은 높이라 온몸이 부러지고 다쳤을뿐, 죽지는 않았다. 병원에서 눈을 뜨니, 반정부 사람들은 “넌 ‘자유’를 위해서 훌륭한 일을 했다”고 기뻐했고, 정부 사람들은 알렉스에게 주입했던 반사적인 폭력혐오를 없애고 알렉스를 ‘친구’라고 부르며 너를 보호해줄테니 이 서류에 서명을 하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알렉스는 비로소 자유가 되고, 다시 폭력을 일삼고 다니지만 그전처럼 즐겁지만은 않다.

알렉스는 자신이 철이 들었음을 알게 된다. 가정을 그리워하면서 청춘과의 이별을 고한다.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 거야.

 

자유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청춘을 들먹이냐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그건 더이상 알렉스가 철없이 까부는 어린애가 아니며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조지 오웰의 미래상이 표현된 전체주의적인 정부의 강압성과, 그걸 저지하려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 한 소년을 이용하는 모습은 정부와 다를 것이 없는 단체.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비행청소년을 사회 악으로 보지만, 그런 비행청소년을 다수의 ‘선’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는 어른들은 과연 ‘선’일까.

 

처음에 보여주는 알렉스의 만행들은 눈살이 찌푸려지고 욕이 나올 정도지만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변화된 모습에서 어떤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폭력으로 대변되던 인간의 자유의지는 ‘철이 든다’는 과정을 통해 가정으로의 회귀라는 형태로 변한다. ‘악’을 물리치는 건 권력의 힘이 동반된 강제적 실험이 아니라, 스스로의 깨달음과 시간이다. 그리고 선과 악, 어느쪽을 선택하던 그것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책에는 ‘요즘 세상의 모든 놈들은 기계로 변해 버렸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사실은 과일처럼 자연스럽게 자란다‘는 말이 쓰여있다. 그 책에 따르면, 신이 이 세상 과수원에 심은 세상이라는 나무에서 우리 모두가 자라고 있고, 신이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사랑때문에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한다. 작중의 가상의 작품이자, 실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계태엽 오렌지>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점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해가는 걸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민주주의라고 외치는 지금 시대는 겉으로는 전체주의와는 거리가 멀지만, 모두 기계화되고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점에서, 우리도 모두 ’시계태엽 오렌지’일 수 있다. 알렉스가 겪은 이 여러가지 더러운 일들은 약간의 과장을 빼면 우리네 모습과 다를바없다. 억지로 실험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아니다라는 1차원적인 주장을 한다면 이미 이용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기계는 자신이 기계라는 자각이 없으니까.

더이상 어리지 않은 알렉스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서 떠났다. 이야기 끝.

 

그리고 내가 지금 가는 곳은, 여러분, 여러분은 갈 수 없는 나 혼자만의 길이야. 내일도 향기로운 꽃이 피겠고, 더러운 세상이 돌아가겠고, 별과 달이 저 하늘에 떠 있을 거고, 여러분의 오랜 동무 알렉스는 홀로 짝을 찾고 있을 거야. 엄청 구리고 더러운 세상이야, 여러분. 자 이제 여러분의 동무로부터 작별 인사를. 그리고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놈들에게는 커다란 야유를. 엿이나 먹으라 그래. 그러나 여러분들은 가끔씩 과거의 알렉스를 기억하라고. 아멘, 염병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