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타인에 대해 스스로가 언제나 열린 존재이며, 자신이 속해있는 공간이 원하는 색을 갖추는 것이 인간관계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너의 ‘색’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 답을 바로 찾기란 쉽지 않다. 나는 언제든 주위와 동화될 수 있다는 자신감은, 한편으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감추는 고도의 심리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자키 쓰쿠루가 네 명의 친구에게 ‘격리’를 통보 받았을 때 그 상실감은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름에서만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도 색채를 띠지 않고 정오각형의 한 꼭지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택한 자아의 결핍임에도 불구하고, 그 희생이 또 다른 상실을 불러왔다는 설정은 하루키 소설의 한 축이기도 하다.

 

A pentagon must have five sides

 

그는 친구들로부터 절교를 통보받고 6개월 여의 고통의 시기를 거치고, 16년이 흐르는 동안 스스로 다 잊어버렸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야바위 꾼이 공기 속에 주사위를 감추듯 자리를 옮긴 것일 뿐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덤덤하게 그것은 사라졌다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결국, 기모토 사라라는 한 여인의 손가락이 가르키는 공기를 뒤집었을 때 그 속에는 주사위가 있었고, 주사위는 ’4′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빠져 나간 바로 네 가지의 색깔이었다.

 

매번 시도하면서도 정복하지 못한 산이 있다면 그 산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다자키 쓰쿠루의 삶또한 그랬다. 절교의 충격은 16년이 지나도 그의 가슴 한복판에 처음 생긴 그대로 씽크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그를 그 당시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수 있었던 네 친구들의 자신에 대한 ‘부정’ 이유를 알기 위해 순례를 떠난다. 아무렇지 않았고, 그래야만 했던 자신의 아픈 상처와 마주하기 위해 그는 용기를 낸다. 그리고 그를 배웅하는 자리에 ‘사라’라는 거대한 존재가 손을 흔들며 기다리고 있다. 그녀와 연결된 실을 놓치지 않기위해 손바닥까지 파고들도록 꼭 묶고 두려운 순례를 떠난다.

 

사람과 사람, 과거와 미래, 그리고 나와 우리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역에서 근무한다는 설정은 다소 직설적이라는 면도 없지 않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준세이의 직업이 복원사였다는 것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주인공의 위치를 암시했듯이, 다자키 쓰쿠루 또한 가는 기차와 오는 기차의 중간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려고 하고 있다. 16년만에 다시 한번 끊긴 기찻길을 연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기차가 멈추지 않는 역은 존재의 의미가 없듯, 사람이 머무르지 않는 관계도 그만큼 허무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p364)

 

과연 그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역을 고치고 친구들을 다시 만났을까.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물음표이다. 어짜피 여행은 나와 타인 사이에 놓인 크레바스를 확인하는 과정뿐일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알게 되는 것은 내가 선 땅, 내가 의지한 마음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하는 일이다. ‘사라’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지는 것은 결국 내가 서 있는 땅의 의미를 다시 깨닫는 계기라는 뜻이다.

결국 이것은 나를 위한 순례

 

그는 다시 생각한다. 평생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내가 누군가에 상처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는 그지만 순례를 떠난 후 생각이 바뀐다. 어쩌면 시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자신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미치는 순간 모든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순례의 전제는 ‘도대체, 왜, 너희들은, 나에게’ 이었지만, 전제가 잘못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너희들은, 나에게’라는 질문이, ‘어쩌면, 내가, 너에게’라는 질문으로 바뀌는 순간 하루키의 이야기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지금까지 독자가 읽어내린 페이지는 모두 그것을 전복시키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루키가 깔아 놓은 묘한 이야기의 복선으로 등장인물의 이름, 색깔, 존재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각각의 인물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진다.

 

색채는 그가 품지 않은 유일한 색

 

사물의 빛은 그것을 반사하기 때문에 드러난다. 모든색을 다 흡수하고 빨강만 반사시킬 때 우리는 비로소 ‘빨강’이라 명명한다. 우리는 결국 빨간색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을 ‘빨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다자키 스쿠루는 아무 색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 어떤 색도 반사시키지 않았다는 의미이면서, 어쩌면 그것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바다’의 의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섣불리 ‘그래, 쓰쿠루에게도 색채가 있었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협소하다. 결국 모든 색은 무채색 바다에 귀결되는 강줄기 같은 의미였고, 다자키 쓰쿠루는 그것들을 하나로 모아 행선지를 정해주는 종착역은 아니었는지 되짚어본다.

 

어느 신문에 실린 하루키의 인터뷰 기사가 떠오른다.

내 소설의 주인공 대부분은 혼란이나 고독, 상실을 헤쳐가고 있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건 그들이 구원받는 광경이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을 이루는 광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