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되 후회는 말자

또 가즈오 이시구로다. 그런데 이번 책은 좀 달랐다. 녹턴보다는 더 재미있었다. 여전히 주인공은 유명하거나 삶을 진취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살아오다 또 노년을 맞이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였다.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가즈오 이시구로 책을 처음 보고 나서 느꼈던 왠지 모를 불편함은 소설인데도 지극히 현실적인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가 생애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지난 날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 종착점은 이 여행을 결심하게 했던 한 사람이다. 출발할 때도 스티븐스는 켄턴양을 좋아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위대한 집사가 되겠다는 목표로 그의 아버지, 좋아했던 여자 모두를 놓치고 만다. 그래서 여행을 하는 내내 그는 회상을 통해 자신은 위대한 집사였음을 강조한다. 품위있는 위대한 집사.

규정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어느정도 선에서 규정하지만 그는 달링턴 홀에 오는 VIP급의 손님들의 질문에는 늘 잘 모르겠습니다로 답한다. 그것이 위대한 집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일,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한채 오로지 주인에 대한 봉사심으로 일을 해 나간다. 과연 그것이 중요했을까 싶다. 종종 그의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눈이 맞아 도망간다. 그런 모습들을 분노했었던 적도 있지만 위대한 집사로서 자리한 그는 빨리 그 자리를 메꾸는 방법을 택한다. 그 역시 가장 중요했을까 싶다. 그는 집사로서의 의무로 인해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한다. 감정에 대한 자제력도 엄청나다. 내가 가장 슬프고 안타까웠던 부분이였다. 사랑마저 자제해야 했던 그는 위대한 집사란 이름으로 덮으려 하지만 집사 이전의 스티븐스의 삶에서 그것은 절대 덮어질 수 없는 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연료가 다한 차를 두고 찾아간 마을에서 그는 자신과 달링턴나리를 동일시 하기도 한다. 일종의 동경일까? 하지만 이내 그의 집사였던 사실이 밝혀지고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을 느낀다. 그는 역시 자신의 삶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켄턴양에게 가기위한 여정을 계속한다. 그의 여행은 켄턴양에게 다시 일을 시작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기 위한 여정이다. 엄밀히 그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지만 사이가 좋지 않다는 켄턴양의 편지를 통해 일종의 설렘같은 걸 얻진 않았을까 싶다.

켄턴양은 스티븐스를 좋아했다. 하지만 일종의 반발감과 한결같고 다소 무심한 듯한 그에게 실망해 결혼을 택하게 된다. 유대인 하녀 두명을 쫒아냈을 때, 그 불합리함에 반발했고 그녀는 문을 박차고 나갔어야 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남게 된다. 왠지 스티븐스보다는 켄턴양에게 매력이란게 느껴지는건 그녀는 다소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만난 스티븐스과 옛날을 추억하며 웃을 수 있다. 스티븐스처럼 후회하며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스티븐스가 후회란 단어로 정의되는 회상을 하진 않았지만 그의 회상은 후회때문일 것이란 내 생각이다. 켄턴양은 그를 좋아했노라고 얘기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삶이 바뀌진 않을 테니.. 하지만 스티븐스는 그럴 수 없다.

위대했지만 슬픈 스티븐스의 삶이였다. 하지만 그도 저녁의 매력을 느끼고 무언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스티븐스만 알것이다. ‘네’로 일관했던 주인과의 대화에서 주인이 바뀌고 ‘유머’가 포함된 대화를 하는 것부터가 그에겐 큰 변화다. 아버지도 위대한 집사로 살았고 노년에 그는 아들과 가까워지지 못했다. 어쩌면 스티븐스 역시 그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끝없이 일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아버지 보다는 집사로 남는길을. 하지만 이젠 아닐것이다. 작지만 큰 변화를 겪은 스티븐스에게는 위대한 집사로 살아가며 자신만의 삶도 살아갈 충분한 의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를 접한 녹턴이란 책과 같이 희망으로 결론짓는다. 주인공들은 비슷하지만 다른 직업과 삶을 살아가고 있고 희망을 잃어갈 때즘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보게 된다. 큰 변화도 아니고 인지하지 못할 수 도 있지만 그들은 그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게 이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작은 선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