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앨리의 야구 미트

동생인 앨리는 왼손잡이용 미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애는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묘사적이었냐 하면, 그 애는 손가락 위도 좋고, 주머니도 좋고, 어디에나 시를 써놓았다.

초록색 잉크로 말이다.

그 애는 말로는 수비에 들어갔을 때 타석에 선수가 나오지 않았을 때 타석에 선수가 나오지 않았을 때 같은 때 읽으면 좋다는 것이다.

지금 그 애는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메인 주에 살고 있던 1946년 7월 18일, 백혈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 애는 나보다 두 살 어렸지만, 오십 배 정도는 더 똑똑했다.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동생이었다.

그 애의 담임 선생들은 엄마한테 앨리와 같은 아이가 자기 반에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는 편지를 써 보내곤 했다.

공연한 말이 아니었다.

정말 그랬으니까.

동생은 집안에서도 그냥 머리가 좋은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좋은 점을 무척 많이 가지고 있던 아이였다.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았다.

어른들은 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들은 쉽사리 성질을 부린다고 했지만, 앨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 애의 머리카락은 정말 새빨갰는데도 말이다.

동생의 빨간 머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고보자 한다.

난 열 살 때부터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내 기억으로는 열두 살 되던 해, 티에 공을 올려놓고 치려는 순간 불현듯 뒤에 앨리가 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뒤돌아 보았더니 바깥 울타리 너머 자전거를 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울타리는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도 150야드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동생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강렬한 빨간색이었다.

그 애는 정말 착했다.

그리고 무슨 일에나 잘 웃는 아이였다.

한번은 저녁식사를 하다가 너무 웃어서 의자에서 떨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난 겨우 열 세살이었을 때, 차고의 유리를 전부 다 깨부수는 바람에 정신 분석 상담을 받기도 했었다.

내가 그 애가 죽던 날 밤 차고로 숨어들어, 유리창을 전부 주먹으로 깨부쉈으니까.

그 해 여름에 샀던 스테이션 왜건의 유리창도 전부 깨보려고 했지만, 내 손은 이미 엉망으로 다쳐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걸 나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앨리가 어떤 아이였는지 알지도 못할 테고 말이다.

지금도 비가 오기만 하면, 손이 욱씬거리고, 더 이상 주먹질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건 주먹을 꽉 쥐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별로 상관은 없다.

내가 외과 의사나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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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작문 숙제라고 생각이 들었고

이 주인공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멋진 소설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내 마음 속 말들을 다 대신해주고 있어서

참 좋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