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이미 부조리하다

출간일 2011년 3월 18일

바닷가 만을 등지고 있는 조용한 도시 오랑에 페스트가 번진다. 그로 인해 오랑은 프랑스로부터 고립된다. 오랑에 있는 그 누구도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도시 밖에 있는 그 누구도 오랑으로 들어올 수 없다. 만일을 위해 편지조차 금지되며, 도시 밖과 안은 오로지 전보로만 송수신될 뿐이다.

 

취재를 위해 오랑에 잠시 머무르던 기자 랑베르는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자신의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오랑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간 두번의 탈출 시도 후, 마지막 순간에 랑베르는 스스로 탈출을 포기한다.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던 오랑의 페스트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이제 볼 대로 다 보고 나니,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이 사건은 우리들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 (273쪽)

 

반면 역시 타지역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는 타루는 랑베르와 다르게 자신은 오랑과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의 위치에서 페스트에 맞설 궁리를 한다. 왜냐면 그에게 페스트는 한낱 유행병이 아닌 삶에서 만나는 온갖 부조리한 것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삶의 부조리에 대해 반항하는 것은, 주어진 혹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고 투쟁하는 것으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타루는 믿기 때문이다.

서술자이며, 주인공이기도 한 의사 리유 역시 랑베르와 함께 보건대를 조직해 페스트와 맞서 싸우며, 페스트 종식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리유는 타루와 같이 적극적으로 삶에 맞서는 부류의 사람으로, 그에게는 의사로서의 책임감 외에도 주어지는 삶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투지가 있었다.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169쪽)

 

한편 오랑의 종교지도자인 파늘루 신부는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유행병이 ‘신의 뜻’ 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재앙 속에서 오히려 신이 바라는 인간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 때문에 생기는 상황을 논리적으로 납득하려 해서는 안되고, 거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91쪽)

 

그러나 파늘루는 페스트가 죄를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 주저하는 빛을 띤다. 어린아이의 죽음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페스트를 ‘그들의 일’이라고 여겼다면, 어린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페스트를 파늘루 자신의 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후, 파늘루 신부 역시 목숨을 잃게 되지만 그의 병명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카뮈는 파늘루 신부의 죽음이 정확히 신의 뜻이었다고는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는 확신도 주지 않는다. 궁금하다. 파늘루는 마음 속으로부터 자신이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던 ‘신의 뜻’을 의심했던 것일까? 그래서 신은 그를 친 것일까? 까뮈가 의도했던 것은 그것이었을까?

 

파늘루의 죽음이 신의 뜻이건 아니건, 유행병이 신의 뜻이건 아니건, 그리하여 인간이 개종되길 신이 원했건 아니건, 까뮈가 <페스트>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내 의지로 정해진 것이 아닌 일에 대한 반항이 있었던 것 같다. 전쟁이나 유행병으로 인해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고립되거나, 혹은 재판정에서 결정되는 범죄자의 처우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카뮈는 <이방인>에서도 역시 이렇게 말한다. ‘이 재판은 나의 것입니다. 나는 피고인 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빼고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입니까.’

페스트로 인한 강제적 고립이라는 부당한 현실을 들어 카뮈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반항이었다. 

 

결국 죽는 거면서, 남보다 고통을 더 많이 겪는 셈이지. (280쪽)

그러나 반항하건 아니건 간에 인간은 끝내 죽음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사가 시작되고, 생과 사는 늘 언제나 한결같이 내 뜻이 아니다.  스스로의 바램으로 태어나지 않았듯, 죽음조차도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은 어떨까.

까뮈는 리유와 타루를 통해 말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반항이 아니다. 진정한 반항은 현실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페스트로 대변되는 삶의 부조리를 넘어서 이겨내는 것이다.

나는 이 도시와 전염병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페스트로 고생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도 이곳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란 얘기죠.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상태에서도 좋다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런 것을 알면서 거기서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는 항상 빠져나가려고 했어요.(319쪽)

 

끌려가지 않고 최선의 반항으로 끝까지 버티고자 했던 타루는 페스트가 물러가던 그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잃고, 그를 보는 의사 리유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존주의자인 까뮈의 <페스트>를 읽은 나는 자못 허무주의자가 된다.

부당한 현실에 끝까지 이방인으로 남아 반항하고자 했던 까뮈도 47세의 젊은 나이에 느닺없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자, 삶은 이처럼 부조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