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소수자의 삶

김혜나
출간일 2012년 12월 31일

<제리>를 읽은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기억 한 곳에 그 소설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정크>란 소설로 다시 작가를 만났다. 정크. 사전을 찾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쓰레기다. 소설 속 주인공 성재가 가끔 내뱉는 단어다. 쓰레기. 나도 가끔 이 단어를 누군가로 향해 내뱉는다. 그 때 그 단어는 나의 분노를 그 대상에게 쏟아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럼 성재에게 이 단어는 무엇일까? 자신을 한없이 낮출 수밖에 없는 그이기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때문일까?

성재는 어머니와 같은 성을 쓴다. 아버지가 없냐고? 있다. 소설 첫 문장이 “성재는?”이라고 묻는 아버지의 말이다. 이유는 첩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와서 돈을 놓아두고 가는 것 정도의 거리만 남은 아버지다. 아버지의 성을 쓸 수 없기에 엄마의 성을 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성이 없다. 민수 형, 주아, 은주 등이 모두 이름으로 불린다. 아버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성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이것은 아버지가 와서 성재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는 것과 또 연결된다. 이 부자의 일상은 이렇게 서로 어긋난다. 이것은 또 엄마와 성재의 엇갈림으로 나타난다. 서로 마주하기를 싫어해서 아르바이트 시간을 조정하는 그의 일상이 바로 그 증거다.

두 번째 장 첫 문장은 “민수 형은, 결혼한 사람이었다.”(15쪽)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그 의미를 몰랐다. 성재는 게이다. 그의 어린 시절 회상 한 자락으로 모든 것을 짐작하기에는 조금 부족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그에게 민수 형은 애인이었다. 미국 유학 떠나면서 헤어졌다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났다. 그는 유학 시절 만난 여자와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 양성애자인 것일까? 민수 형에게도 성재는 애증의 대상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고 있고 가장 안정적인 섹스의 대상이다. 하지만 결혼한 민수 형은 다시 엇갈리는 아버지와 같은 관계로 변한다.

홀어머니에 게이인 성재는 이 사회에서 가장 소수 지위를 가졌다. 학벌도 좋지 않다. 아르바이트로 생활하지만 경제적 안정감이 없다. 흔히 미국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돈 잘 버는 게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어릴 때 엄마의 화장대에서 그를 매혹시켰던 화장 등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란 직업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경력도 거의 없고 나이도 적지 않고 거기에 흔하지 않은 남성이다. 뭐 요즘 남성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많아졌다고 하지만 아직은 소수다. 이런 조건과 환경은 그에게서 삶의 의지를 빼앗는다.

3개월에 한 번 보건소에서 익명으로 에이즈 검사를 받는다. 이 장면에서 그의 속내가 드러난다. “내가 도망치고 싶고, 달아나고 싶은 그것은 죽음도, 에이즈도, 사람들의 시선도 아니었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고 또 무서워했던 것, 그것은 바로 삶이었다. 죽도록 도망치고 싶지만 죽어도 도망쳐지지 않는 이 현실, 내가 서 있는 이곳, 나, 라는 인간, 나, 라는 인간의 더럽고 구질구질한 한 생애가 두렵고 무서워 이가 덜덜 떨렸다. (중략)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었고, 당장 죽어 없어진다고 해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은 순간만 자꾸 이어졌는데 그런데, 그런데, 나는 또 자꾸만 살고 있었다. 살아 있었고, 살아가고 있었다.”(175쪽)

삶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삶은 계속된다. 욕망에 몸을 맡겨 섹스를 나누지만 단순한 배출이다. 그가 바라는 사람은 민수 형이다. 하지만 한 여자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는 자신의 삶의 벽을 쌓아간다. 벽은 결코 낮지 않다. 감정은 쉽게 제어되지 않고 관계는 파국으로 이어진다. 이 파국의 끝에서 그는 다시 생존의 힘을 발견한다. 아버지를 인정한다. 이 부분은 성장 소설로 봐도 될 것 같다. 민수 형과의 애증은 연애소설이고, 그가 흡입하고 마시는 마약은 또 다른 삶의 공간이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의 고뇌와 자기비하와 현실의 높은 벽이 가장 소수자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