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제목이 <The Portrait of a Lady>. 이 책을 읽어가면서 상권의 중간쯤 들어가면 책의 한글 제목은 당연하게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한 여인의 초상>으로. <여인의 초상>과 <한 여인의 초상>은 당연히 다르다. 주인공 여인이 이사벨 아처라는 이름의 재색을 겸비한 미국 태생 여자로 앞으로 긴 세월을 영국에 살게되고, 그러나 모든 여자를 대표하지 못한다. 따라서 당연히 <한 여인의 초상>이라고 해야 하는데….. 요새 나한테 미운털이 콱 박혀있는 출판사 창비가 이런 짓 하나는 정말 잘해서 정말로 <한 여인의 초상>이라고 제목을 달고 똑같은 책을 찍었다. 비슷한 것이 모파상이 쓴 <여자의 일생>. 그것도 원어로는 <한 인생> 또는 <어떤 인생>이지만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여자의 일생>으로 했다가 그냥 굳어져 우리나라도 덩달아 <여자의 일생>으로 굳어졌다고 들었다. (아마 예전 포스트에도 그렇다고 썼을걸?)

 

내가 왜 굳이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서두를 떼냐하면, 이 이사벨 아처가 젊은 시절에. 이종사촌이 자기 아버지한테 받아야 하는 상속금 가운데 7만 달러를 본인은 모르는 것으로 하고, 이사벨이 상속받게 해주는데, 이걸 읽으면서 나는, 정말로 처절하게 “나한테는 왜 곧 죽어버릴 돈 많고 자식없는 이모부나 삼촌이 없느냔 말이다!”라고 절규했으며 애먼 마누라한테도 “혹시 나 모르는 너네 삼촌 가운데 돈 많고 장가 안 든 양반 안 계시냐?”고 했다가 타박만 오지게 먹어버리고 말았다.

7만 달러가 그까짓 것 얼마나 되냐고? 계산해드리지. 때는 1850년대. 기분 좋게 1860년이라고 가정하여 그때 돈 7만 달러가 지금 돈으로 얼마쯤 될까, 라는 것을 계산하기 위해 150년 전이라고 뚝 잘라 생각하자. 그 동안의 평균 이자율을 4%로 본다. 고전을 읽어보면 유럽 각국에서 이자율은 아예 4%로 고정된 것 같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를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나같이 연 4%인지. 20세기 초반과 중반 전쟁시기를 거치면서 무지막지한 이자율을 보인 적도 있지만 겸손하게 그냥 4%로만 보겠다. 환율 또한 겸손하게 1달러 당 1,000원으로 하자. 그럼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파일을 여시라. 그리고 이렇게 입력해보시라.

+70,000*(1.04^150)*1,000

(입력 했으면 enter)​

 

그때 돈 7만 달러는 지금 우리 돈으로 최하 251억원과 같은 수준이다.

머리 좋고 얼굴 예쁘다는 걸로 이종사촌 마음에 들어 가만히 앉아서 251억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여자 얘기다. 나한테 251억 말고 200억 원만 있고, 하루에 백만원 씩 쓰면서 30년 동안 살 수 있다고 가정하면, 제일 먼저 마누라한테 92억원을 뚝 떼주고 그만 살자고 하겠다. 그럼 마누라도 여보 당신하고 살면서 생전 이렇게 고마운 일은 여태 없었수, 하며 즐겁게 제 갈 길로 갈 거 같지 않은가. 그 다음 날부터 난 정신 없을 거다. 하루에 백만원씩 써제끼느라고.

그래, 물론 안다. 세상은 60억년 전에 지구가 생겼을 때부터 단 한 번도 공평한 적이 없어서 나한테는 그런 일이 죽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걸. 맞아, 어찌 왕후장상의 씨와 내 씨가 같을 수 있겠는가.

 

위에서 이렇게 썼다고 해서 이 책 <여인의 초상>이 그저 그런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오산. 미국인이지만 생의 많은 부분을 영국에서 산 헨리 제임스가 쓴 귀신 나오는 소설 <나사의 회전>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근 1,000 쪽을 넘어가는 긴 책을 정말 단숨에 읽게하는 작가의 신공이 놀랍다. 다만 내가 이렇게 갑자기 하늘에서 돈벼락을 맞은 신디(폭킹)렐라 얘기는 참 좋아하지 않는지라 나하고 궁합이 맞았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재미난 책을 폄훼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아, 나도 죽을 때는 이사벨 아처의 이모부처럼 근사하게 죽고 싶은데. 돈을 많이 남겨서가 아니다. 죽는 모습이 정말 품위있게 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