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할 거리가 참 많은 책이다.

영미권 소설에서 가끔 종말론을 다룬 소설을 만나게 된다. 최근엔 <나는 전설이다>, <셀> 같은 장르소설에서 먼저 이를 만났다. 이 소설도 그런 종류와 비슷한 궤도를 달린다. 최후의 생존자라는 설정으로 인류의 삶을 되돌아본다. 물론 앞에 말한 두 소설에 비해 이 소설은 좀 더 사변적이고, 섬세하고, 현실적이다. 그렇지만 눈사람으로 불리는 지미의 삶으로 드러나는 미래의 모습이 결코 행복하지도 밝지도 않다. 이 부분은 현실에 기반을 둔 설정이란 점에 동의하게 만든다.

 

인류 최후의 일인. 익숙한 설정이다. 나와 다른 존재들이 가득한 곳에 홀로 살아남은 나. <나는 전설이다>에서 이미 본 설정이다. 하지만 두 소설은 진행 방향이 다르다. <나는 전설이다>가 홀로 남은 자의 처절한 사투와 새로운 인종의 등장을 호러 형식으로 표현했다면 이 소설은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현실에 기반을 둔 상상력으로 꾸며낸다. 문명 비판적이고, 암울한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국가라는 존재보다 부에 의해 사는 지역과 삶의 질이 결정되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 사고와 일상은 현재 우리의 삶을 조금 더 발전시킨 모습이다. 정보는 통제되고, 음란 사이트는 쉽게 접속되고, 살인 장면이 여과 없이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고, 개인의 인권은 조합의 이익 앞에 힘없이 무너진다. 이런 세부적인 장면들이 소설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지만 지속적으로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원제는 오릭스 앤 크레이크(ORIX AND CRAKE)다. 이 두 인물은 최후의 일인인 눈사람 지미와 연관 있다. 크레이크는 천재 유전공학자로 인류의 종말을 앞당긴 인물이고, 오릭스는 삶의 황폐함과 지루함 속에 살던 지미를 사랑으로 이끈 여인이다. 이 둘은 지미의 유일한 친구이자 사랑했던 여인이다. 하지만 인류 종말 후 이 둘은 신세계에서 크레이크가 창조한 크레이커들에겐 창조주와 같은 존재다. 크레이커는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존재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풀만 먹고, 발정기가 있고, 오줌으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한다. 그들은 또 유전적으로 완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얼굴에 조그마한 주름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그들이다. 인간이 가진 폭력과 잔인함과 욕심을 제거한 새로운 존재다.

 

이들과 눈사람은 신과 예언자의 관계다. 자신들을 창조한 크레이크에 대한 숭배는 눈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다. 눈사람은 크레이크의 전설을 창조하고, 크레이커들과 함께 했던 오릭스의 이야기에도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낸다. 이 전설을 보다 보면 신화의 형성 과정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자연적이고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는 능력에 불멸의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눈사람의 직업과도 관련이 있다. 회사의 홍보활동을 주로 한 그의 이력과 연결되는데 그 자신의 기억과 인문학적 신학적 기억에 따라 덧붙여지고 삭제되고 창조된다. 어린 크레이커들이 크레이크를 만나고자 할 때마다 그가 하는 변명은 참 허술하지만 아직 충분히 사유할 능력이 없는 그들이기에 아직은 잘 통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잠시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오기 위해 여행을 다녀온 사이 벌어진 그들의 행동은 새로운 인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유전학적 교배물이 등장한다. 늑개니 돼지구리니 너구컹크니 하는 존재다. 단어만으로도 어떤 동물이 교배하여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존재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보면 현재 인류가 어떤 유전적 실험을 준비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종종 SF소설에서 이런 존재들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본 기억이 있기에 더 흥미로웠다. 그리고 엄청난 빈부의 격차와 식량난과 유전자 식품의 등장에 의한 기존 동식물의 퇴출과 멸종은 이 소설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엄청난 과학의 발전이 꼭 인류의 미래를 풍족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윤리와 도덕과 자유와 평등 등의 가치를 생각하게 된다.

 

미래의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지구란 공간적 속박은 우주라는 무한대의 공간을 제외할 경우 조금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설정에서 이런 가능성을 제외한 것이 의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조그맣게나마 말하고 지나갔으면 한다. 단숨에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지금도 소설 속 설정과 상황들이 머릿속에서 맴돌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소설을 읽고 여러 사람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면 참 많은 이야기 거리가 생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