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세기] 이상현상이라는 혼돈의 시기를 통과하는 주인공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성장소설…

연령 13세 이상 | 출간일 2014년 9월 15일

#1. ‘슬로잉’이라는 작품의 배경을 결정해주는 탁월한 소재설정

   이 작품은 지구의 자전이 느려져 하루가 길어지는 ‘슬로잉’이라는 이상현상을 소재로 삼은 소설입니다. 그렇다고 디스토피아 소설은 아니지만 작품속 현실을 보면 다분히 인류에 위협이 될만한 상황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상황은 인간들을 불안하게 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게 만듦으로써 사회에 대혼란을 야기하고 악영향을 줍니다. 이런 상황 설정을 통해 인간의 본연에 숨겨진 불안, 분노, 나약함, 공격본능, 이성상실 등 다양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들이 상당히 그럴듯하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슬로잉’이라는 소재, 상황 설정은 무척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한편으로는  ‘슬로잉’이라는 현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작가가 묘사하는 장면들의 면면은 우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실상 아무도 앞날을 모르고 예측도 불가능한 상황이다보니 답답하기만 해 보입니다. 이와 동반해 ‘슬로잉 증후군’이라는 신체적인 이상현상까지 나타납니다. 이는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고 심리적인 부분이 크게 작용하는 병리현상으로 표현됩니다. 예상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인간이 얼마나 불안해하는가를 간접적으로 잘 표현해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개인적인 사건도 아니고 지구의 자전속도 변화라면 이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대혼란, 모두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는 것이죠.

   사람들을 통제하고 나름의 규칙을 정해 끼워맞추려하는 것은 늘 권력 계층이고, 이 계층의 권력욕구를 뒷바침해주는 것은 일단 나의 생존이 중요하다 여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입니다. 무규칙의 상태, 규정할 수 없는 상태를 싫어하는 권력 기득권은 대자연이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으므로 적어도 사람들의 행동만큼이라도 예측가능한 범주에 넣어두려 노력합니다.이에 응해 다수의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생존본능에 충실히 일단 통제를 따르도록 서로를 종용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세력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 합의에 벗어난 선택을 하는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응징과 린치를 가합니다. 굳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런 행동을 통해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스스로 증명하려하고 정신승리를 꾀하는 것이지요.  이 작품은 이러한 인간들의 심리적 행동을 자연스럽게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2. 주인공의 회상을 통해 설명되는 세계는 담담하기만 하다.

    비록 ‘슬로잉’이라는 현상이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양식조차 바꾸어 놓을 만큼 강력하기는 하지만 이제 갓 성장하는 열두살 소녀에게는 그저 신기한 일일 뿐입니다. 소녀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현상으로 인해 가정의 분위기가 변하고, 학교에서는 더욱 고립됩니다. 이 와중에 여러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기존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한 남자아이를 좋아하는 감정의 홍역을 치루기도 합니다. 그렇게 소녀는 성장해갑니다.

“어쩌면 슬로잉 이전부터 시작되었겠지만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개비와 나의 우정이 허물어지고 있었다는 걸.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은 그 자체가 험난한 항해였다. 힘든 여정이 늘 그렇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일 수는 없었다.”p132

   이렇게 힘든 성장과정에서 겪는 일들이 의외로 담담하고 잔잔한 가장 큰 이유는 서술자체가 과거회상식 서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식은 감정의 과잉을 방지하고 사건을 좀더 객관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감정에  대해 더욱 애틋한 감정을 느끼도록 해줍니다.  

 

#3. 성장은 험난하지만 그 기억은 아름답다.

“그 시기를 회상할 때 머리속에 떠오르른 것 하나는 우리가 정말 빠르게 적응했다는 사실이다. 한때 익숙했던 것이 점점 낯설어졌다. 우리의 해가 정해진 시간에 드고 졌다는 사실이 놀랍게 생각되었다. 내가 한때 외로움도 수줍음도 덜 타는 행복한 소녀였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나간 시절에 대해서는 언제나 신화가 덧입혀진다고 나는 생각한다.”p.147

    유래없는 변화속에서 성장통을 겪는 소녀의 상황은 그야말로 혼란하기만 합니다. 그 와중에 부모의 외도까지 목격하면서 더욱 불안정한 상태로 치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모습은 참으로 빛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녀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주인공 줄리아가 느끼는 감정은 지극히 일반적이고 공감할 만한 감정들이고 독자들의 어린시절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주인공이 예뻐보이고 사랑스럽고 대견하기까지 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지구 자전이 느려지건, 빨라지건 어떤 환경에 처하건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겪어왔던 애틋한 그 지난 시절의 기억은 과히 기적의 세기라 부를 만 합니다. 줄리아가 느낀 그 경험들은 바로 우리 모두가 겪고 아름답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언젠가 소중히 꺼내 보듬을 지난날의 기억은 즐거움이든 슬픔이든 상관없이 아름답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