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일 2013년 12월 16일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읽으면서 이것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되었다. 작가가 가공의 인물을 통해 말하고 있는 노인 의료의 문제는 현재 우리에게도 진행중이고 앞으로 더욱 많은 문제를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루시하라 다다스가 주장하는 폐용신의 절단을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많은 거부감이 생긴다. 일반 사람들의 사지 중 하나 혹은 네 개를 절단한 사람을 보는 시각이 변하지 않는 한 쉽게 이행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각은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읽으면서 이것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되었다. 작가가 가공의 인물을 통해 말하고 있는 노인 의료의 문제는 현재 우리에게도 진행중이고 앞으로 더욱 많은 문제를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루시하라 다다스가 주장하는 폐용신의 절단을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많은 거부감이 생긴다. 일반 사람들의 사지 중 하나 혹은 네 개를 절단한 사람을 보는 시각이 변하지 않는 한 쉽게 이행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각은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용어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폐용신(廢用身)이고, 다른 것은 제목인 A케어다. 폐용신은 마비 증세로 손상을 입어 영구적으로 불구가 된 신체다. 불구가 되었다면 전혀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거나 통증이 전달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폐용신이 갑자기 움직여 문제를 일으키거나 움직이지 않는 신체 때문에 생활의 불편이 생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간호하는 사람들이 환자의 무게나 갑작스런 움직임 때문에 허리 통증이나 기타 병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환자가 가벼우면 상관없지만 무거울 경우 이동에 더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고 환자 자신도 욕창 등에 더 자주 걸린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것인 폐용신의 절단이다. A케어의 A는 amputation에서 따온 것이다. 절단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한 단어 선택이다.

 

사지절단이라고 했지만 대부분 A케어를 받은 사람들은 폐용신만 절단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사지가 모두 절단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팔 하나 혹은 팔 다리 하나씩 정도다. 그런데 독자에게는 이 절단이란 단어와 절단된 노인의 이미지가 거부감을 준다. 점점 늘어나는 노인 환자들과 간호 및 간병인들의 피로도를 생각할 때 우루시하라의 방법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한다. 물론 이것에 대한 정확한 통계도 자료도 충분히 없다. 단지 우루시하라의 이진자카 클리닉에서 폐용신 절단 수술을 받은 노인들 13명의 데이터만 있을 뿐이다. 이 데이터를 어떻게 신뢰할 것인가는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다.

 

A케어라는 놀라운 제안이 소설 전체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면 구성은 기존 소설과 완전히 다르다. 앞부분은 우루시하라가 A케어에 대해 쓴 책이고, 뒷 부분은 이 책을 쓰게 만든 야구로 슌타로란 인물의 주석이다. 이 둘은 거의 비슷한 분량이다. 우루시하라가 쓴 A케어 주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의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새로운 노인 의료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소설이라기보다 의사의 학설에 더 가깝다. 읽으면서 이 책이 소설 맞나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다. 반면에 야구로의 주석은 A케어에 대해 비교적 냉정한 평가를 담고 있다. 기본적으로 호의적이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폭로되는 기사와 A케어 환자의 친족살인과 자살 등은 본질적 문제를 제쳐놓고 자극적인 외양에 집착한다.

 

사실 소설의 가독성이 높아지는 부분은 주석이다. 우루시하라의 A케어를 폄하하려는 언론의 공격은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객관성은 사라지고 자극적인 부분만 남는다. 기사에 증인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신뢰가 뒤로 가면서 하나씩 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하나씩 흘러나오는 우루시하라의 모습도 처음과 조금씩 달라진다. 가장 문제가 되는 노인 의료는 안중에도 없고 자극적인 A케어만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이 공격은 국민의 알 권리란 주장으로 왜곡되어 밖으로 드러난다. 일반 대중도 마찬가지다. 자극적인 볼거리에 빠져들어 그들에게 동조한다. 얼마 전 SNS의 부작용에 대해 언론에서 한동안 집중 공격한 적이 있는데 그들이 끼친 더 큰 부작용을 생각하면 참 얼굴의 철판도 두껍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주석을 통해 우루시하라의 시술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 개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을 통해 드러난 의사의 숨겨진 이면은 충격적인 대목이 많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를 옹호하는 무리가 대다수다. 그것은 그가 지닌 열정과 순수함 때문이다. 그의 과거를 세 사람의 각각 다른 경력을 지닌 간호사를 통해 드러내었을 때 분명해진다. 현장에서 닳고 닳은 간호사는 기존 체계에 안주하려는 의도가 더 강하다. 그리고 개인의 평가는 평가자 상대의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매스컴이 만난 사람들은 아마 자신들의 논조를 강조하기 위한 사람들로 혹은 왜곡한 상태로 발표된다. 이것은 우루시하라의 아내 기쿠코 부인의 방송 출연에서도 잘 드러난다. 편집은 악마라는 말이 생각난다.

 

결코 가볍게 읽을거리가 아니다. 의료 현장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동시에 무시무시한 대안 시술이 나온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철학을 주입받고 자란 우리나라에 이 시술은 엄청난 거부감을 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힘겹게 부모 등을 간호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고민을 던져줄 것이다. 물론 의학적으로 A케어 후 좋아진 사람들의 모습이 검증된다면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하고. 마지막까지 새로운 소설 형식으로 포장한 구성은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