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
연령 13세 이상 | 출간일 2014년 7월 14일

<경마장 가는 길>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른다. 나에게는 이런 소설들이 몇 권 있다. 내용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지만 재미있게 읽은 책들 말이다. 이후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진술>에 대한 극찬을 읽고 사서 읽고 난 후 이전과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몰입도와 재미와 반전까지 펼쳐지는 그 소설은 지금도 개인적으로 작가에 대해 기억하는 최고의 소설이다. 그리고 2년 전에 나온 <손님>도 상당히 좋았다. 경마장 시리즈를 다 읽지는 않았지만 몇 권 읽으면서 재미와 이해의 간극을 크게 경험한 것과 비교해 이 두 작품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럼 이번 소설은 어떤가?

 

누나라는 제목과 함께 기대한 것은 이전과 비슷한 구성의 소설이었다. 그런데 얼마 읽지 않아서 이전과 다른 소설임을 깨닫게 되었다. 열두 살 소년이 화자로 등장해서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귀신과 전설과 환상 등을 섞어 사슬처럼 이야기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텔레비전도, 아니 라디오도 없던 시절을 배경으로 열두 살 소년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 아주 잘 그려내었다. 토속적인 구어도 좋았지만 어떻게 포장하면 한 소년의 성장소설일 수도 있는데 ‘씹’과 같은 노골적인 표현을 적나라하게 사용해 놀라게 했다. 이 단어가 한두 번 정도 나오면 엄숙한 문단의 분위기가 반영되었구나 생각할 텐데 끝까지 나오면서 더 놀랐다. 아마 나의 놀람은 다른 소설들에서 이렇게 열두 살 소년이 이 단어를 지속적으로 노골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자지를 본 여자의 보지를 봐서 입을 다물게 하겠다고 생각을 하는 장면들에서 전혀 각색되지 않은 노골적 표현들이 등장하고, 귀신과 뱀을 두려워하는 소년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용기를 내는 장면은 풋풋한 첫사랑의 분위기가 풍긴다. 약간 미친 것 같다는 누나의 사연이나 까마귀 눈알을 먹어 귀신을 본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현실 속에서 피어나는 괴담 같다. 만오천 년을 산 나무와 결혼한 이야기나 동굴에 들어가서 난쟁이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만 전체 분위기 속에서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전설과 설화가 너무 당연한 듯 소년의 입을 통해 나올 때 마치 그것들이 현실처럼 느껴진다.

 

책의 재미난 구성 중 하나가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체 이야기가 완전히 독립된 것도 아니다. 어느 것은 갑자기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사슬은 단단하게 이어져 있고, 열두 살 소년의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 상상력과 충격과 아픔으로 가득한지 잘 보여준다. 열두 살 소년의 이해 안에서 보는 세상과 실제 세상과의 차이를 볼 때면 순수함을 상실한 나의 모습과 아직은 잘 모를 수밖에 없는 열두 살의 현실이 먼저 다가온다. 이런 장면들이 반복될 때면 나의 그 시절이 살짝 떠오른다. 아마 나도 그랬지 않았을까 하고.

 

정확한 연도는 나오지 않지만 70년 대 초로 예상되는 그 시절 삶의 모습은 지금과 완전히 다르다. 풍요보다 결핍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펼쳐지는 열두 살 소년의 모험과 사랑은 이후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년의 입을 통해, 생각을 통해 나오는 단어와 이야기들은 흔히 어른들이 아이들은 잘 모를 것이란 생각에서 쉽게 내뱉는 말들이 많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이런 착각의 틈새를 잘 포착하고, 불분명한 이야기 때문에 오해와 환상이 덧붙여지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속에도 삶이 들어있다. 작가의 이전 작품과 조금 색다른 느낌이지만 수많은 이야기들이 문득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간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