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남자와 영원한 사랑을 믿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

 

몇년 전 국내에서 개봉했던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이 내 머리속에 떠 오른다.

“지울 수록 특별해 지는 사랑……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습니다.(You can erase someone from your mind. Getting them out of your heart is another story.)”

이 영화의 카피문구가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개봉하자마자 봤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은 지우면 지울수록 서로에게 더욱 더 끌리게 되는 그런 영화로 기억된다. 참 가슴아픈 이야기였는데…

여기 이터널 선샤인과 비슷한 모티브를 가진 책이 있다.

“사랑의 역사”로 국내에 알려진 니콜 크라우스의 첫 번째 소설<남자, 방으로 들어간다>가 그 책이다.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자 컬럼비아 대학교 영문과 교수였던 샘슨 그린이 어느 날 8일 째 행방불명이 되고, 열두 살 이후의 기억은 모두 상실해 버린 채 사막에서 발견된다. 병원에 옮기고 진찰을 받는 도중 샘슨의 뇌 속에서 여러 달 동안 모양세포형 성상세포종이라는 종양이 샘슨의 뇌에 치명적인 압박을 뇌에 가해왔다는 진단을 받게 되고, 샘슨은 생명 연장을 위해 뇌종양 수술을 받고 아내와 함께 다시 예전에 샘슨이 생활했던 집으로 돌아가지만 모든 게 낯설고 두렵기만 한 샘슨, 이런 그에게 구원의 손을 내민 레이 말콤박사, 그렇지만 그는 샘슨을 하나의 출력물로 생각하고 도널드 셀윈이라는 입력물의 기억을 샘슨의 기억에 넣어버리게 되고  그는 점점 더 방황의 늪에 빠져 들게 되는데…

 

앞에서 말한 내용은 이 책 <남자, 방으로 들어간다>의 주요 줄거리다. 기억 상실에 걸린 샘슨과 현대 과학과의 만남이 샘슨에겐 더욱 더 큰 고통을 주게 되고 그 상황을 벗어나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는 고통이 더 큰 방황으로 다가온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주인공인 샘슨과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은 기억 상실에 걸렸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샘슨은 12살 이후의 기억이 전부 사라져 사랑도 사라진 반면에 조엘은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우지만 지울수록 그가 했던 사랑은 더욱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는 차이점이 있다.

 

우발적이든 인위적이든 사람의 머리속에 각인된 기억이나 추억들이 단 한번에 없어져 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또 내 머리속에 다른 사람의 기억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면 과거의 나는 정말 영영 없어져 버리는 걸까? 물론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이지만 이런 상황이 된다면 나의 과거나 나의 미래는 과학이라는 소스에 의해 좌지우지될지도 모른 상황이 올 것이다.

 

니콜 크라우스가 쓴 <남자, 방으로 들어간다>는 ‘기억 상실’이라는 모티브를 과학과 연계시켜서 자아를 잃어버린 자의 정체성과 고독, 남녀간의 관계에 대해 분석하는 소설로 이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집필의도를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앞 뒤 문맥을 이해하면서 읽을려고 노력했지만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쉽게 알아차릴 수는 없었고 다 읽고 난 후에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난 이런류의 책들을 좋아한다. 한번 읽고 줄거리나 내용을 파악하고 흥미 위주로 읽은 소설은 두 번 다시 읽지 않지만, 니콜 크라우스의 <남자, 방으로 들어간다>류의 책은 한번 읽었을 때 몰랐던 내용을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차츰 알게되고 내가 느끼지 못했던 느낌이나 생각들을 깨닫게 되면서 내게 또 다른 감흥을 주기 때문이다. 이 책도 한 3번 정도 읽어야 작가의 생각과 내 생각이 일치될 듯 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니콜 크라우스의 처녀작인 <남자, 방으로 들어간다>가 나중에 출간된 점이다. 이 책이 먼저 출간되고 <사랑의 역사>가 나중에 출간되었다면 크라우스의 문학적 느낌들을 더 쉽게 느끼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튼 뉴욕문단에서 ‘문학신동’이란 뜻의 ’분더킨트(wunderkind)’로 통하고 2002년 미국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남자, 방으로 들어간다>를 통해 니콜 크라우스만의 매력적이고 완벽한 문학적 감각을 느껴 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