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에서 냉정으로

처음으로 서머싯 몸의 책을 읽었다. 좀 부끄럽다고나 할까.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달과 6펜스>는 정말 오래 전에 사두었지만, 아직도 읽지 않고 있다. 그러다 지난 주 독서모임에서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이 다음달 독서모임 책으로 정해지면서 부랴부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그 재미가 고전소설임에도 탁월했다. 카프카의 <소송>과 더불어 나의 고전읽기 트라우마 탈출에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인터넷 위키피디아로 영국 출신의 저자 서머싯 몸을 검색해봤다. 사실 이름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내가 이 작가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나 싶을 정도로 무지했다. 물론, 다른 인터넷 기사와 리뷰도 참조했는데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동성연애자였음에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는 점과 통속소설작가로 생전에 불렸었노라는. 그리고 91세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남프랑스 니스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남부럽지 않은 삶이지 않았을까.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은 지금까지 모두 세 번 영화화되었는데 최근작으로 원제 그대로인 <페인티드 베일>은 2006년 존 커랜 감독이 연출을 맡아 나오지 왓츠가 여주인공 키티 역을, 에드워드 노튼이 냉정한 남편 월터 페인 역을 그리고 찰스 타운센드 역을 리브 슈라이버를 캐스팅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 소위 잘나가는 막장드라마 뺨치는 스토리라인의 구성을 읽으면서 왜 당대 사람들이 서머싯 몸의 작품을 통속소설이라 불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작가가 서두의 <저자의 말>에서 밝히듯이 <인생의 베일>의 모티프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그 유명한 <신곡>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먼저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걸작소설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인생의 베일>의 주인공 키티와 닥터 월터가 이끌어가는 서사의 힘은 대단하다. 스토리는 매우 간단하다. 런던 사교계의 꽃이었던 키티가 조급한 마음에 사랑하지 않지만 멋진 외모의 정부 세균학자 월터 페인의 세련되지 못한 청혼을 받아 들여 결혼에 이른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의 말로는 홍콩 총독 차관보였던 중년의 멋쟁이 찰스 타운센드와의 불륜으로 치닫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키티를 너무 사랑하는 남자 월터는 콜레라가 창궐하는 죽음의 땅 메이탄푸로 부정한 아내와 향한다.​

소설은 키티와 찰스의 외도가 남편 월터에게 발각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19세기에 태어난 작가 서머싯 몸은 어떻게 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에 여주인공 키티의 시선으로 영혼을 불어 넣는다. 그리고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플래시백 기법으로 어떻게 해서 키티의 어머니 가스틴 부인이 왕실변호사인 남편을 닦달해서 상류사회에 진입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꿈이 좌절되자 이번에는 딸들을 좋은 혼처에 시집보내는 과제로 인생의 목표를 수정했는지 등등에 대한 제국주의 시절 영국 상류사회 일상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이 벌이는 게임에서 사랑이란 부질없는 감정의 찌꺼기일 따름이다.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감추어진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에 대해서도 서머싯 몸은 가차 없는 비판의 시선을 보낸다. 사랑에 눈이 먼 키티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에게 보내는 온전한 사랑을 지루하다고 폄하하면서, 찰스 타운센드만이 자신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녀는 마치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아를 스스로 만들어서 사랑한 것 같은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그들의 부정을 알게 된 월터는 찰스의 외도가 키티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그녀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얼음장 같은 차갑게 제공한다. 언제나 그렇듯 열정이 냉정으로 변하는 순간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 여기서 과연 찰스 타운센드는 비난의 대상이어야만 하는 걸까? 적어도 키티와 찰스는 서로가 사랑한다고 믿는 동안만큼은 서로에게 정직했다. 하지만 키티의 희망처럼 찰스는 자신의 와이프인 도로시와 전혀 이혼할 생각이 없었다. 언젠가 식민지 총독이 될 거라는 꿈을 꾸던 그는 자신의 이력에 오점을 남길 그런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가 키티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부적절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찰스 타운센드는 그렇게 자신이 누린 아름다움을 책임질 마음이 전혀 없는 비열한이었다. 바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키티는 절망하게 된다. 통속소설이라는 세간의 비아냥거림에도, 이런 관계의 치밀한 구성이야말로 <여성의 베일>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진짜 이유가 아닐까.

한편, 역병이 창궐하는 사지(死地) 메이탄푸로 스스로 들어간 닥터 월터에게 죽음은 숙명일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타운센드의 감정을 확인한 키티는 현지 중국인들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봉사하는 프랑스 수녀원장 일행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새로운 삶에 도전하게 된다. 물론 완벽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 키티는 월터가 죽고 영국으로 귀향하는 길에 들린 홍콩에서 불같이 일어난 욕정 때문에 실수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런 점이 그녀가 존경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수녀들의 비인간적일 정도로 극도로 정제된 감정표현과 대비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마침내 아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아버지 가스틴 씨와의 한판 대결은 의미심장했다.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난 마침내 여인으로 거듭난 키티의 성장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전형적 통속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은 읽는다면 아마 독자는 키티와 월터가 펼쳐 보이는 부부/연인 사이에 얽히고설킨 감정의 동선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작가가 입체적인 캐릭터 창조에 공을 들인 노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열렬하게 자신의 아내를 사랑했지만 끝내 부정한 아내에 대한 용서를 거둘 수 없었던 월터의 고뇌를 작가는 냉정하게 기술한다. 그가 용서할 수 없었던 건 키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던가. 어쩌면 실제 삶에서 동성연애자였지만, 결혼해서 부부생활을 했던 서머싯 몸이 가진 이중적 모습에 대한 변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메이탄푸에서 역병으로 죽어나가는 중국인들을 돌보는 월터의 모습은 타인에게 성자(聖者)의 그것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키티는 월터의 행위가 자신의 부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릇된 의도와 가치에서 비롯된 행동이 전도된 진실로 바뀌는 아이러니를 서머싯 몸은 탁월한 기량으로 지적한다.

인간관계의 핵심에 대한 작가 나름의 성찰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빚어내는 삶의 드라마는 확실히 재밌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출생한 작가의 고질적 오리엔탈리즘 기술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서구인들에게 동양이라는 공간은 여전히 미지의 신비스러운 오브제일 뿐이고, 그 공간에 사는 이들 역시 동경이 아닌 동정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물론, 철없는 소녀였던 키티가 불륜과 부정 그리고 남편의 죽음 등을 겪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여성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시대를 앞선 사고의 발현이라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역겹고 소름끼치는 생물체’라는 표현까지 빌리는 서구인들의 시선을 가감 없이 그대로 표현한 장면에서는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여성성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보여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시대의 한계를 보여준 작가의 시선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제 소설을 재밌게 읽었으니 다음은 영화로 만나볼 차례다. 철부지 사교계 처녀에서 산전수전 경험한 여인으로 거듭나는 역할을 소설의 주인공보다 실제로 열 살 정도 더 먹은 나오미 왓츠가 과연 어떻게 연기해낼지 자못 궁금하다. 대신 냉정하기 짝이 없는 무심한 표정의 연기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에드워드 노튼의 퍼포먼스는 기대 이상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소설에서 서머싯 몸은 새로운 사건이나 일화에 앞서 숫자로 표현했는데, 아마 영화에서는 각색 작업에서 그런 부분들이 배제됐을 거라고 추정된다. <인생의 베일>의 번역은 여성 번역자가 맡은 것 같은데, 책 속지의 저자 소개에서 서머싯 몸이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위해 ‘의사를 때려치운다’라고 기술한 점이 눈에 띄었다. 물론 그 부분은 역자가 아니라 출판사에서 쓴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남성작가의 글을 여성 역자가 번역해서 그런지 여성작가의 감성이 곳곳에서 느껴지기도 했다.

다시 한 번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에 이어 서머싯 몸의 <여성의 베일>을 통해 고전 문학도 신간 못지 않게 재밌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타진해낸 것이야말로 이번 독서 최대의 수확이다. 내친 김에 역시 서머싯 몸의 대표작이라고 꼽히는 <달과 6펜스>에 도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