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아직 몰랐다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38 | 서머싯 몸 | 옮김 송무
출간일 2000년 6월 20일

말로만 듣던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이제야 읽게 됐다. 하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가 많아, 대강의 줄거리는 꿰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읽은 것하고는 또 다른 체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해 양가적 감정이 내적으로 치열하게 충돌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이 40세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열정 하나만 가지고, 그동안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훌쩍 떠난 한 남자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쏟아내는 자아와 또 한편으론 참 멋지다라는 느낌이 동시에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 현실과 이상이라는 서로 상이한 두 세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성장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는 자조적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이 생활에 충분한 돈까지 벌어다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기가 쉽지 않다. 영국 출신의 작가 서머싯 몸이 프랑스 야수파 출신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삼은 소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영국 런던에서 증권 중개인으로 활동하던 중, 어릴 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17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훌쩍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스트릭랜드 부인은 참을 수가 없다. 그녀는 찰스가 그림이 아닌 다른 이유, 젊은 여자가 생겨 떠났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때 절실하게 사랑한 사람이 자기가 사랑했다고 믿는 남자의 꿈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서머싯 몸은 작가의 페르소나 역할을 충실하게 대행할 인물로 화자인 나(역시 작가다)를 투입한다. 나레이터 역할의 나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행적을 쫓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캐릭터다. 찰스의 관심 분야와는 다르지만, 명확한 예술가이며 일반인들의 일상적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찰스와 그나마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에게 찰스가 이야기를 털어 놓으니 소설의 진행에 큰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하다.

소설 <달과 6펜스>는 크게 세 개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초반부의 영국 런던에서는 내가 어떻게 해서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 소설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프랑스 파리가 그 무대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특정한 공간에 가야 한다는 공식이 그 시절에도 있었나 보다. 이 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하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 더크 스트로브와의 애증에 얽힌 삼각관계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왠지 초중반의 긴장감에 비해 남태평양 타히티에서의 찰스 스트릭랜드의 최후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김빠진 콜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시켜 버린 예술가에게 마지막 걸작을 남기는 것 외에 무슨 사명이 있단 말인가.

이상적인 도덕론자도 아니면서 독자의 양심을 건드리는 것은 17년간 함께 한 가족마저 저버린 찰스 스트릭랜드의 행동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어디까지인 걸까. 스트릭랜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의 가족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찰스는 가족 특히 아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모름지기 예술가는 이상과 현실을 병행할 수 없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서머싯 몸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프라하의 어느 천재 작가 역시 현실 속에서 창작의 고통에 괴로워하지 않았던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소설의 제목처럼 하나는 이상을 지칭하는 ‘달’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물질이라는 이름의 현실을 상징하는 ‘6펜스’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두 명의 캐릭터가 자못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야 도덕성 때문에 실컷 욕을 먹었을 테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할 것이다. 첫 번째 인물은 바로 나레이터인 ‘나’다. 어떻게 해서 나는 계속해서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에 개입하게 되는 걸까. 그 때는 아직 인간의 본성이 모순되고, 성실성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위선이 내재되어 있는지 몰랐다는 고백에서 미생(未生)의 인격을 만나기도 했다.

어쨌든 런던, 파리 그리고 마지막의 타히티까지 아우르는 여정은 도저히 개연성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타히티의 숲 속에서 태고적 아름다움의 비밀을 만났게 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의 개연적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타히티까지 갈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 내가 그곳까지 가서 직접 스트릭랜드의 최후를 목격한 사람들의 전언을 듣게 된 것은 운명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소설적 장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예술가가 아닌 다른 직업군의 사람이 나레이터 역할을 맡았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불사른 천재 화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열정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물론 두 번째로 이야기할 문제적 인간 더크 스트로브야말로 그 누구보다 앞서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일찍이 인정했다. 후반에서 찰스 스트릭랜드가 죽기 전에 쉽게 그의 그림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허다했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나레이터의 말은, 예술마저 물신화되고 돈이라는 가치로 계량화된 현대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의 또 다른 문제적 인간은 바로 더크 스트로브다. 나는 그를 어릿광대라고 부르곤 하는데, 비록 그것이 그의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적인 행위를 한 그에게 지나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배은망덕이라고 한다면 세계 챔피언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는 더크 스트로브와 부인 블란치의 지극한 정성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면서도 결국 한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고야 마는 신공을 보여준다. 주변의 호의를 아무런 염치도 없이 받아들이면서, 최소한 지켜야할 인간의 도리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 예술가의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냉혹한 잔인성에 그만 질려 버렸다. 어쩌면 서머싯 몸은 이런 극단적 대비를 통해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론을 터득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우리나라 방송계를 쥐락펴락하는 막장드라마의 원조격이라고나 할까.

더크 스트로브는 찰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팔리는 화가지만,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화가라고 생각하는 찰스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은인을 환쟁이라고 부르면서 주저하지 않는다. 창조의 재능이 없다고 해서, 그 창조력을 분별하고 비판하는 능력까지 부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더크 스트로브는 온 몸으로 대변해준다. 물론, 이런 찰스의 행동을 파악한 나레이터 나는 교묘하게 그를 자극하면서 이야기의 빠진 퍼즐 조각들을 하나둘씩 채워 넣는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에게 빠져 자신을 버린 블란치가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용서하겠노라고 나에게 선언한다. 문제는 블란치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비극의 피날레에서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가 그린 블란치의 누드화에 칼질을 하려는 순간, 영혼의 고뇌를 거쳐 정화된 예술혼의 결정체에 압도되는 장면이야말로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사족에 불과할 따름이다.

<달과 6펜스>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폴 고갱의 삶에 대해 호기심을 느껴 찾아보았더니 정말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나름의 논리를 갖춘 냉혹한 예술가 찰스 스트릭랜드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란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 현실에 견주어 볼 때, 사후에 비로소 재평가를 받게 된 과정조차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원하는 달(개인의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 정도는 문제없다는 인식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달에도 가기 어렵지만, 현실세계에서 6펜스를 얻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