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도착한 현재와 만나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간 <우리가 고아였을 때>가 새로 출간되었다. 사실 진짜 신간은 10년 만에 나온 <파묻힌 거인>(Buried Giant)인데, 이제 막 본토에서 출간되었으니 번역이 되어 우리 수중에 들어오려면 제법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쨌든 이 책으로 기존의 가즈오 이시구로 책은 모두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내가 읽은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책은 <나를 보내지 마>가 유일한데, 도서정가제를 앞두고 부리나케 다른 책들도 사두긴 했지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신간에 대한 욕심을 접고, 그 책들부터 읽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일본 나가사키 출신으로 영국에서 자라 영어로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를 보고 있노라면, 역시 비슷한 경로로 미국에서 활동 중인 이창래 작가가 연상된다. 일본에서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창래 작가의 글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다기 보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자란 환경 때문에 미국 작가로 보는 게 보편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심스럽게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에게도 같은 룰을 적용해본다.

이번에 새로 나온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5번째 소설로 지난 2000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탐정소설을 표방하는 이 소설은 여러 매체에서 혹평을 받았는데,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 역시 자신의 베스트 작품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즈의 비평가 미치코 카쿠타니 역시 서평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실망스러운 작품이라는 이야기라고 선전포고를 날린 바 있다. 미치코 카쿠타니에 따르면 기존의 작품과는 달리 납치, 간통, 살인 사건 조사 그리고 많은 전쟁 기간 중의 학살 같은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내러티브가 등장한단다.

소설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20세기 초반 중국을 배경으로 해서 아편거래를 마다하지 않던 주인공 크리스토퍼 뱅크스의 아버지와 부군의 사업에 반대하던 어머니가 차례로 실종되고, 당시 10살이던 크리스토퍼는 영국으로 보내져 자라게 된 상황에서 시작된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나 런던 사교계에서 널리 알려진 탐정이 된 크리스토퍼에겐 숙제가 하나 있다. 다른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인 부모님의 실종을 대면하는 것이다. 중국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는 영국 출신 엘리트가 멀리 이국에서 18년 전의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는 소설 초반에 주인공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상하이가 아니라 영국의 기숙학교에 적응해야 하는 십대 소년의 그것을 디킨즈 특유의 디테일로 다루고 있다. 너무 잘나서도 안되고, 매사에 중간 정도 하면서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는 그런 고도의 스킬이 요구되는 청소년기는 삶이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을 배우는 기간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자신의 입지를 전적으로 뒷받침해 줄 부모라는 존재가 없는 ‘고아’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이모 슬하에서 자란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여느 영국 청년들처럼 런던 사교계에 진출하게 됐고, 그 와중에 만난 세라 헤밍스와의 소위 밀당을 통해 크리스토퍼는 중국으로 가서 실종된 부모님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그리고 어려서 절친했던 일본친구 아키라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과 함께. 그 결과, 소설은 현재의 노련미 넘치는 탐정 크리스토퍼와 과거 유년시절 아키라와 더불어 탐정놀이를 하던 꼬마 크리스토퍼의 이야기가 중첩되면서 진행되기에 이른다. 바로 그 지점에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는 정확할 수 없는 개인의 단상, 혹은 기억을 곳곳에 배치하면서 소설 속의 화자가 추구하는 부모 실종에 대한 진실 규명이라는 목표에 강렬한 열망을 강조한다. 물론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는 미스터리 소설답게 후반 클라이맥스에 반전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홍군의 밀정으로 ‘노란 뱀’이라 불리는 미지의 인물이 바로 자기 부모 실종사건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믿고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로운 부분이다. 결국 말미에서 사건의 전말은 그의 입을 통해 풀리게 된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디킨즈 못지않은 섬세한 디테일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이시구로 작가는 순전히 상상으로 창조되었을 크리스토퍼가 살던 상하이 공동 조계의 저택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던 시절은 봄바람처럼 그렇게 지나가 버리고, 부모의 실종과 동란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시기에 대한 예고편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야기가 본격적인 국면에 접어들면서는, 포화가 쏟아지는 중일전쟁의 한복판에 직접 뛰어 들어 미로 같은 시가지를 누비는 주인공의 모험이 일품이었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토퍼가 그렇게 고대하던 아키라와의 조우가 그 와중에 일어났다는 점과 18년이 지나 실종/납치된 그의 부모가 상하이 시내에 잡혀 있고 마침내 그들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전선으로 달려 나간다는 점이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또 다른 면에서 이시구로 작가는 위선적 서구 제국주의 비판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역업으로 위장하고, 인도산 아편을 중국 민중에서 판매해 막대한 이윤을 추구하는 제국주의 첨병으로서의 영국 상사의 진짜 모습을 그대로 폭로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항의하는 역할 역시 영국 출신 크리스토퍼의 어머니에게 주어졌다는 점에서 여전히 서구인들이 갖고 있는 전통적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기존 작품에서 그랬던 것처럼 과거와의 타협 역시 소설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자신 역시 고아였던 크리스토퍼는 제니퍼라는 소녀를 입양해서 후견을 맡지만, 자기 삶의 중요한 과제인 부모 실종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향한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렇듯, 현재는 과거로부터의 연장이다.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우리의 삶이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는 과거와 어떤 식으로든 타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좋든 싫든 간에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유년기를 극복하고 비로소 어른으로 거듭남에 대한 성장소설로 읽힐 지도 모르겠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와의 두 번째 만남은 만족스러웠다. 메타포 보다는 디테일에 천착하는 그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 모양이다. 나의 책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녹턴>을 비롯한 그의 다른 작품들을 천천히 만나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