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예예찬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수필 모음집

P162. 나는 우리가 이미 상실해 가고 있는 음예의 세계를, 적어도 문학의 영역에서만이라도 상기시켜 보고 싶었다. 문학이라는 전당의 처마를 깊게 내고 벽을 어둡게 하여, 지나치게 잘 보이는 것을 어둠 속에 밀어 넣고, 쓸데없는 실내 장식을 벗겨 내고 싶었다. 물론 집집마다 그리하겠다는 말은 아니고, 한 채 정도는 그런 집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자, 그럼 어떻게 될지 시험 삼아 전등을 꺼 보면 어떻겠는가.

P168.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여름은 가능한 한 여름다운 편이 좋다. 만약 삼복 폭염에 허덕이는 괴로움이 없다면 교토의 가을이 지닌 매력은 얼마나 감퇴하겠는가.

제목의 음예예찬은 다니자키의 여러 수필 중 하나로, 책에는 음예예찬을 제외한 6가지의 수필이 더 실려있다. 그 나머지는 활동사진(영화)과 오사카인, 반소매 등을 소재로 한 수필로, 음예예찬만큼 통찰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내용을 보기 전에 먼저 제목을 살펴보자. 제목의 음예예찬은 쉽게 말해 그늘에 대한 찬양이다. 책 표지에 한자가 같이 병기되어 있어 뜻을 유추하기에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테지만, 사실 뜻을 알아도 알쏭달쏭한 느낌을 준다. 그늘진 것, 어둠이라는 단어 뒤에 찬양이라는 말이 따라붙기가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기 전부터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라는, 그런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이 제목이 눈길을 끌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풀어서 쓰는 것 대신 압축된 한자어를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초기 단편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다니자키의 글에는 유독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단편 <인어의 탄식>이 그랬는데, 그 점이 다니자키의 작품을 더 유려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고 나 또한 한자어가 주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묘사가 무척 마음에 들었었다. 아무튼, 기존 작품에서 그랬던 것처럼 제목도 쉬운 말보단 압축된 말을 사용했다는 점이 일단 무척이나 ‘다니자키’ 작품 같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타 출판사에서 출간된 다니자키 수필집은 <그늘에 대해서>로 나왔는데 제목만 봤을 때는 이해하기 쉬운 이쪽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본문 내용을 고려하면 개인적으로는 민음사 쪽 제목이 취향이다.

제목에서 말하듯 수필은 우리 주위의 온갖 그늘에 대해 끊임없는 찬양을 되풀이한다. 하얀 쌀밥을 어두운 그릇에 담는 이유부터 시작해서 다다미 방의 그늘, 여름에 전등을 키면 안 되는 이유, 겹겹이 껴입은 옷에서 느껴지는 그늘 등 그 소재가 참으로 다양하다. 글을 읽다 보면 그 소재가 끊임없이 뒤바뀌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러다 보면 이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이야기할 작정인가 싶기도 하다.

처음에 글을 읽으면 작가가 그늘에 대해 갖고 있는 확고한 가치관에 약간 쫄(?)게 된다. 이렇게까지 그늘에 목을 매야하나 라는 그런 기분이 드는데, 그건 아마 내가 살면서 ‘불 좀 키고 살아!’라는 선생님과 엄마의 잔소리에 익숙해진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니자키는 그늘에 대한 예찬 말고도 지나친 밝음에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낸다. 예시로 여름 밤의 이야기를 들면서, 여름 밤이 너무 뜨거운 이유는 밤 늦게까지 집을 밝히는 조명 때문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달구경을 하러 갔더니 주위가 너무 밝아 달이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지나치게 밝은 것을 비판한다. 밤이 밤답지 못하기 때문에 밤이 되면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던 선선함과 밤에만 즐길 수 있었던 즐거움을 놓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치의 어둠도 용납하지 않고 더 밝은 것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모습은 모순투성이다. 밝아질수록 이제껏 우리가 미美라고 칭해왔던 것들과 밤이 되면 자연스레 느끼고 즐길 수 있던 것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빛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많지만 그만큼 잃어버린 것도 있다. 때로는 빛보다 ‘그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고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