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보다 유리바닥을 깨야할 때

보통 어떤 대상을 비판할 땐 제 3자의 위치, 혹은 대상과 반대의 위치에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것과 다를바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리처드 리브스는 상위 20%에 속하는 중산층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을 비판하는 용기를 보였다.

‘유리 바닥’이라는 개념도 신선했다. 유리천장에 막혀 중산층으로 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동시에 유리 바닥을 더 견고하고 두껍게 만들어 그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위로 올라가는 것에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아래로 떨어지는 것에는 두려움이 수반된다. 당장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해한다고 해서 80%가 겪는 불평등을 용인할 수는 없다. 당장 나와 내 자식의 안위를 위해 태어나서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는 아이들의 불행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은 남의 아이를 돕는 것 같겠지만, 넓게 보면 미래의 내 아이를 위한 것이다.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에서 중상류층에서 떨어질 경우 더 깊게 추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책은 계속해서 20%가 누리는 특혜들과 그 특혜를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박탈하고 착취해가는지 설명한다. 이 책을 읽고도 내 아이를 위해 기부금으로 대학을 보내고, 지인을 통해 인턴 자리를 꿰찰 사람들은 분명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깨달음을 얻은 중산층들은 저자가 말한 ‘변화를 위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미국 사회를 기반으로 쓰였음에도 한국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깊어질수록 빈부격차 또한 심각해진다. 부가 부를 낳고 엘리트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적어도 남들과 동등한 출발선에 서려고 하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지고 있다.

나 또한 그를 체감하고 있고, 지금 나의 세대는 앞으로 더욱 극심한 격차를 느끼게 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미래에 어떤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될지 모르지만, 현재의 위치에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꿈을 꿀 기회조차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