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거울 앞에서 합창하는,

그가 소년이었을 때, 삶을 내려놓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성경을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이 있었다.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해 끝이 없는 죄책감을 느꼈고, 사건에 관련된 자신의 모든 죄책감을 머릿 속에서, 마음속에서 필사적으로 소멸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지우고자 했던 죄책감이, 실은 그의 인생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연희에게 일어난 일은 그가 라면을 먹지 않았어도 일어났을 일이다. 그가 라면을 먹은 사건과 연희의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라면을 먹지 않았어도 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는 자기가 행한 다른 일을 끄집어내서 그 사건의 원인으로 상정하고 자책했을 것 이다. 무엇이든 끌어냈을 것 이다. 만들어 내기라도 했을 것 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식이었다.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 죄의식이 느껴져서 괴로웠을 테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테니까. 차라리 죄의식을 만들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자기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괴로워 하는 것보다 나았을 테니까. 그는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 죄의식을 필요로 했다.

- 이승우 <지상의 세계> P.45

‘연희’는 ‘후’의 사촌누나였고, 후는 라면을 먹어본 적이 없는 어느 한 시골 마을에 살았다. ‘연희에게 일어난 일’은 그 시골마을에 ‘박 중위’가 근무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후는 박 중위에게 라면을 얻어먹었고, 박 중위는 후에게 연희의 이야기를 물었다. 연희는 후에게 라면을 얻어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박 중위는 연희에게 사랑한다고 말했고, 연희의 아버지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녀를 챙긴 연희의 삼촌, 즉 후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후의 아버지는 박 중위와 연희를 술집의 단칸방에 밀어넣고 등을 돌린다. 연희는 그 곳에서 박 중위에게 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받는 ‘일’을 겪었고, 그렇게 연희는 그 시골 마을을 떠났다. 후는 그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며 비 내리는 어느 날 밤, 손에 칼을 쥐고 박 중위를 찾아간다.

나중에 후가 아버지에게 했던 말을 옮기자면 그는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죽을 줄은 몰랐다’. 죽였다고 하면서 죽을 줄은 몰랐다고 하는 이 모순된 진술은 그의 내면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는 두려웠고, 머릿속으로 크고 작은 빗금들이 수없이 지나가는 걸 느꼈고, 그러나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알게 될까 봐 두려웠고, 어쩔 줄 몰랐고, 그러나 어쩌지 못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느꼈고, 그래서 비명을 지르며 무작정 내달렸다. 그는 무슨 일인가를 벌였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어서 알지 못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 이승우 <지상의 세계> P.89-90

이성을 잃고 박 중위를 무자비하게 찔러댄 후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산 정상에 위치한 천산 수도원에 가게된다. 그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공간에서 후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 같은 성경을 읽으며 지낸다. 이곳은 현실의 삶을 잊고자하는 사람들이 모여살았고, 그들은 그곳을 ‘헤브론성’이라고 불렀다. 천산 수도원은 몇 십년 후, 유품이 되어버린 ‘강영호’의 짧은 기록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부천의 어느 대학의 교회학 강사인 차동연은 강영호의 기록을 보고 천산 수도원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 발품을 팔던 중, 퇴역군인 ‘장’을 만난다.

방 한가운데 놓인 책상 한쪽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 이번에는 장이었다. 장은 불려들어온 수도사를 마주하고 앉아 진술을 받았다. 수도사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사실대로 상세히 말해야 했다. 이름과 나이와 고향과 세상에서의 직업과 헤브론성에 들어온 날짜와 들어오게 된 동기에 대해. 그들은 세상을 버리고 떠나왔지만 세상은 그들을 잊지 않고 찾아와서 과거의 시간을 불러냈다.

-이승우 <지상의 세계>P.164

소설은 장을 만난 시점부터 우리가 흔히 아는 근대사의 역사를 끌어온다. 장은 헤브론성에 살던 사람들의 절반을 내쫓고, 그들과 외부의 소통을 통제하는 ‘특수임무’를 맡았다. 이 특수임무로 인해 후는 헤브론성에서 쫓겨나게 되고, 연희를 찾기 위해 전국을 누빈다. 미용실에서 일했고, 고향에서 멀어지고 싶다던 연희의 말에 의존하여 후는 걷고, 또 걷는다. 미용실에서 돈을 벌고, 이름 모를 집단에게 구타당하고, 다른 이에게 몸을 내어주는 사랑을 하기도 하며 연희를 찾는다. 이렇듯 권력자의, 강자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강제성은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파멸한다.

이렇듯 장의 등장은 개인의 후회와 회개에 관한 내용이 사회로 연결되는 지점이 된다. 1970년, 그 당시의 정권은 군력을 동원하여 헤브론 수도원을,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시대 자체를 점령했고, 한 인간의 인생이 정부의 지침에 따라 주체성을 잃고 흘러간다. 소설 속 헤브론성의 수도들은 국민으로 대표되고, 국민을 지키는 역할인 정부는 헤브론성 입구에 설치된 초소로 대표된다. 초소는 외부로부터 헤브론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설치되었지만, 실은 그들을 통제했다. 통제 당한 것은 헤브론성의 수도원에서 점점 초소를 지키는 군인에게까지 퍼졌다. 군인들은 왜 그들이 초소를 지켜야하는 지 묻지 않았고, 물을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정치의 톱니바퀴를 강제적으로 돌렸을 때 초래되는 결과를 볼 수 있다. 자연적으로, 그들의 힘으로 천천히 돌아가야하는 톱니바퀴에 인력이 가해져 빠르게, 세상의 윤리를 거슬러 움직이게 되었을 때, 그것은 사회시스템의 모든 연결고리에 영향을 미친다. 이 영향의 끝은, 결국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사고회로를 막고, 개인이 사회에게 ‘정복’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고만다.

형제들이 남자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부장이 장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저 양반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세 명뿐이다. 각하와 그대와 나. 저자들은 이 세상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고, 나올 수도 없는 사람들이니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까 각하나 나나 그대가 누설하는 경우 말고 이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는 길은 없다. (…..) 그대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은 이 수도원이 아니고, 이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물론 저 양반도 아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대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하는 것은 보안이다. 여기에 저 하늘에 미친 수도사들 말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승우 <지상의 세계>P.179

부장이 말하는 ‘저 양반’은 한정효라는 인물이다. 한정효는 대통령의 피살과 군사정권의 집권이 시작된 시기에 천산 수도원으로 들어온다. 그는 독재정권의 파렴치함과 군사의 잘못된 역할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되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사실은 그가 기억하는 권력자의 과거의 유출이 두려워)져서 감금된 장소이지만, 후와 같이 바깥 세상에서의 자신의 죄가 두려웠던 그에게는 오히려 최적의 장소가 되었다. 한정효는 그 곳에서 후가 했던 것 처럼 성경을 읽었고, 성경을 통해 자신을 보았다.

결국 비극을 막지 못했어. 새벽에 군인들이 천산에 들이닥쳤지. 수도원 형제들은 8년 전 그날과 마찬가지로 기도원에 모여있었어. 8년 전과는 달리 대부분이 노인인 형제들은 지하로 끌려들어갔어. 젊은 군인들은 그 속에서 한 선생을 찾지 않았어.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찾지 않았어. 찾았다면 찾지 못했겠지만, 그들은 찾아내라는 지시를 받지 않았던거야. 그들은 한 선생이 누구인지도 몰랐어. 젊은 군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일을 했어.

-이승우 <지상의 세계>P.259

바깥 세상의 자신의 모습을 잊은 지 8년 째 되는 어느 날, 장이 찾아왔고, 수도원을 떠나야한다고, 정부가 당신을 노리고 있으니, 아마 이 곳을 곧 쓸어버릴거라고. 당신이 떠나지 않으면 수도원의 형제들까지 죽는다고 협박도, 부탁도 아닌 말을 들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수도원의 성자를 지키겠다는, 용사와 같은 의지로 수도원을 떠났고, 그도 후처럼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의의 무리가 승리하는 흔한 영웅소설과는 달랐다. 한정효가 성자들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안락을 깨버리는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은 일어났다. 권력자의 불안의 해소를 위해 무차별한 희생이 이루어진 당시는 지상에서 890m 높이에 위치한 헤브론성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그 안에 있던 이들은 하늘로 향했고, 그 곳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이 부분에서 독자는 ‘존재성’에 대해 생각해보아야한다. 세상 모든 사람과 공간, 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형태를 가지고, 형태를 가진 물건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도 흐른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며, 개개인의 존재를 중시하는 현재는, 그저 형태의 유무를 떠나,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자는 주장의 근거로도 쓰인다. 천산 수도원도 외부에 존재하는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공간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몇몇의 인간은 그 이치를 거슬러 그 곳을, 그 곳에 있던 사람을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표면적으로는 헤브론성만이 외부의 압력으로 존재를 잃고 의미를 잃은 것과 같지만, 그 배후에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존재를 지운 이들이 더욱 많았다.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선글라스를 한밤중에 쓰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밤에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장군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그리고 그는 조금 전의 쑥스러움 대신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눈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의 근육이 팽팽해졌다. 그는 장군이 왜 햇빛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가리지 않고 선글라스를 끼는 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졌다. (……) 그는 눈빛을 감추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빛을 감추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눈빛을 감추면 거리낄 것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그의 몸이 가르쳐 주었다. 눈은 너무 순진해서 위장할 줄 모른다는 걸,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수도 있고 마음과 다른 표정을 지을 수도 있지만 마음과 다른 눈빛을 만들 수는 없다는 걸 그는 그때 알았다. 눈빛은 위장할 수 없고 다만 감출 수 있을 뿐이라는 걸 그는 그 때 알았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그것이 필요하게 된 것은 눈빛을 감출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승우 <지상의 세계>P.191-192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란 자격을 박탈시키고 그저 권력의 앞에서 고개를 끄덕인 하나의 ‘무리’가 되길 자처한 것은 바깥 세상에서 혁명이란 이름 아래 무차별적 폭력을 휘두른 한정효를 비롯한 그 시대의 권력자들이었다. 그 시대 권력자들은 하나 같이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군사 혁명 위원회’라는 이름 아래 개개인의 의견은 무시되고, 존재를 부정당했다. 이승우는 거역이 용납되지 않는 당시의 사회체제와 그 사회체제에 굴복하여 선글라스를 끼고, 자신을 지운 채 스며든 이들의 비극을 담았다.

이처럼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 반발하지 못하고, 가면을 써, 자신이 아닌 모습을 자신이라 쇠뇌시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무엇을 숨기거나 가리기 위해서 가면을 끝까지 벗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은 그 세계에는 가면 그 자체가 자신들의 얼굴이라고 생각하여 벗을 수 없게 된다. 가면은 너무 필수적이라서, 시간이 흐를 수록 그들은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 조차 망각한다.

이 사실을 깨우쳐 줄 것은 ‘거울’ 뿐이다. 소설에서 거울과 동등한 작용을 하는 것은 바로 ‘성경’ 이다. 후는, 그리고 한정효는 성경을 읽으며 자신을 알았고, 천산 수도원 내의 인물들도 ‘성경이 큰 거울’ (p.101) 이라고 말했다. 비종교인에겐 다소 거북한 표현일 지 모르겠지만, 이승우는 이를 통해 종교에 대한 맹렬한 신봉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시야를 넓혀, 후와 한정효 이외에 차동연, 강영호, 그리고 그의 동생 강성호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 차동연은 장이 털어놓은 역사의 이야기가 사실이 되어, 드러날 진실이 두려웠다. 그 진실을 밝혀낸 것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 두려웠다. 그의 얼굴에는 서서히 가면의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역사 속의 희생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헤브론성으로 들어간다. 차동연에게 거울은 헤브론성 뒤에 숨겨진 ‘진실’ 이었다. 형의 시한부 판정을 받은 강성호는 형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멈추기 위해 바쁘게 시간을 흘려보냈고, 죽음의 소식을 들은 때에도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강영호가 끝마치지 못한 헤브론성에 대한 이야기를 보곤 흔들린다. 무덤덤한 표정의 가면을 썼던 강성호는 결국 강영호의 열정을 보고는 형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고, 그를 위해 시간을 사용했다. 결국 강성호에게 거울은 형인 강영호였다.

마지막 순간에 형제가 ‘형제’라고 하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후는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 그를 부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만 부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제는 형제가 아니라 형제들을 불렀다. 형제로서 그는 형제들과 같이 있었다. 형제로서 그는 형제들과 같이 있어야 했다. 형제들이그 때문에 그를 그곳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이승우 <지상의 세계>P.402

이처럼 개개인에게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있고, 그 거울들은 모두 세밀하게 얽혀 있다. 사회의 그물망은 복잡하게 얽혀있고, 그것을 강제로 끊어버릴 수 없으며, 설령 그것을 끊어버린다한들, 시간이 지나면 감춰진 역사는 수면위로 떠오른다. 자신의 거울을 찾아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고, 그 진실의 뒤편에 숨겨있던 또 다른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숙명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지상의 노래는 끊이지 않고 그 음계를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