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지배적인 감정을 꼽으라면 죄책감이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생각 없는 말의 차가움에 데였다. 이런 거다.

“정아는 습관적으로 내뱉던 병원에 가야지, 가 튀어나오려는 걸 막는다.

엄마는 병원에 갔다. 더 이상 엄마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

<오늘의 엄마> 24쪽

 

처음에는 ‘엄마와 딸’이라는 키워드에 꽂혀서 샀던 책인데 읽을 때는 나태, 회피, 주인공 자매의 다툼에 집중했다. 얇고 가벼운 종이가 손가락을 베려 때를 재는 듯했다. 책이 땀에 젖어 울퉁불퉁해질까 봐 축축한 손을 바지에 닦으며 읽었다. 예쁜 책은 깨끗하게 읽고 싶은데 책이 나를 방해했다.

 

신경질적인 대화, 미숙함. 익숙하다. 정아는 남자친구와 사별할 줄 모르고 툭툭댄 과거를 잊었다. 자책하며 울던 것을 잊었다. 엄마가 마비된 다리로 화장실에 가는 것을 안절부절 바라보던 것을 잊었다. 익숙함과 나태와 피로가 툴툴댔다. 마지막 대화일 줄 모르고.

 

이렇듯 감정은 우습다. 하루살이다. 작심삼일도 못 간다. ‘엄마는 이해와 응원의 대상’이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수시로 음소거 됐다.

 

그런데 책을 덮었을 때 나는 울 수 없었다. 엄마와 싸우고 나서 엄마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나를 상상할 때면 잘만 나던 유치한 눈물인데. 한 번 울고 털어버릴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뱉어내 버리면 안 되는 어떤 것이 가슴에 맺혔다. 몇 방울 안 될 것 같은데 속에 있으니 출렁출렁 멀미를 일으켰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의 저자 줄리아 새뮤얼은 말한다. 사별 후 비슷비슷한 고통을 겪는다고. 죽음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는 것 같아 죄책감을 느낀다고 한다. 일상으로 돌아오려면 용기를 얻어야 한단다. 잘 와닿지 않는다. 다만, 죽음을 사랑으로 상실을 삶으로, 작가님이 내 멱살을 잡아끌었다. 정아가 죄책감, 열등감, 무기력감을 지나 살아있음에 의미를 붙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기까지.

 

엄마가 건강할 때는 엄마의 삶에 관심 갖지 않았듯, 사람은 얄팍하고 그래서 복잡하다. 그건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이면에 이별이 있음을 잊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작별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싶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매 순간 후회하지 않도록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랑하는 것일 터다.

 

나는 죽음이 뭔지 안다, 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꼭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토론 동아리에서 ‘청춘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토론했다. 뭘 토론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대척점에 가까운 ‘죽음이란 무엇인가’.  뭐라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다면 작가를 했을 것이다. 작가님은 그걸 소설로 풀어냈다. 예술이다. 젊은작가 시리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