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주의!

 

 

 

책을 읽기 전, 책을 펼치자마자 왼쪽에 적혀져 있는 간략하게 추려진 작가의 삶을 쭉 읽었다. 아마 세 번 정도 읽은 것 같다. 읽은 후에는 맨 뒤에 연도대로 정리된 작가 연보를 읽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20년.

“장래 희망을 묻는 담임의 앙케트에 ‘문학’이라고 회답.”

자신의 굳은 신념이 있는 사람이구나, 멋있다, 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은 사진 세 장과 수기 세 권을 받은 ‘나’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서문을 읽으면서 표지에 있는 에곤 실레의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과 기술되어 있는 오바 요조의 얼굴이 닮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름답지만, 기괴한.

자신의 의지로 익살꾼이 되길 선택한 오바 요조. 그의 세 권의 수기를 몽땅 읽고 만 나는 서문에서 묘사된 일그러트린 요조의 얼굴이 마냥 안타까웠다. 빠른 눈치 탓에 익살을 택하고 만 어린 요조. (탓이라고밖에 표현을 못하겠다. 어린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나.) 책을 다 읽은 후 서문으로 돌아가 그 얼굴을 상상하면 기괴하다는 생각보다는 애처롭다는 생각부터 든다. 하녀와 머슴에게서 겁탈을 당하고도 단념하고 마는 어린 요조의 모습에서 아픔을 느꼈다. 장난꾸러기의 성격과는 정반대인 요조가 ‘장난꾸러기’라는 이미지를 스스로 택하고, 잔인하고 추악한 범죄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참으며 힘없이 웃고 마는, 인간의 이중성에 처절한 슬픔을 느끼면서도 그 속에 섞여들기 위해 익살을 부리고 마는 요조의 모습. 생각이 많아진다.

쓰네코와 자살 기도 이후, 쓰네코는 죽고 자신만 살아남아 자살 방조죄라는 이유로 오랏줄에 묶이기까지 한 요조. 그 이후 가족들에게 외면 받고 넙치네 집에서 지내다가 결국에는 시즈코네 집에 들어가 살게 된다. 문득 고향 집이 생각나 서글픈 날에는 혼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럴 때 미약하게나마 구원이 되어 준 건 시즈코의 딸, 시게코이다. 거리낌 없이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시게코. 그런 시게코의 입에서 “시게코는 말이야, 진짜 아빠가 갖고 싶어.”라는 말이 나오자 요조는 크게 휘청거린다. 자신에게 미약한 구원이 되어준 시게코마저 마음속으로는 ‘가짜’아빠 요조가 아닌, ‘진짜’아빠를 원하고 있음을 알아챘으니, 그곳에서 오는 배신감과 상실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이후 담배 가게의 요시코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 집에서 일어났던 일마저도 너무 잔인하다. 특히 호리키. 요조에게 ‘너처럼 오랏줄에 묶이는 치욕 같은 건 겪은 적이 없어.’라는 말을 한다던가, 겁탈 당하는 요시코를 두 눈으로 봐놓곤 말릴 생각 없이 다시 위로 올라와 요조에게 보고를 한다던가, 요조를 데리고 내려가서는 부러 큰 기침소리를 낸다던가. 호리키의 모욕적인 말에 기분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요조는 체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호리키가 저를 그렇게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 저는 옛날부터 인간 자격이 없는 어린아이였던 것입니다. 역시 나는 호리키한테조차도 경멸받아 마땅한지도 모른다고 고쳐 생각했습니다.

요조는 경멸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다. 요조는 끊임없이 사랑을 말했고 사랑받길 원했는데 다들 그런 요조를 외면하고 핍박한다. 호리키의 심한 말에 필사적인 항변의 소리가 끓어오르지만 요조는 늘 “내가 나쁜 거야.”라고 단념한다. 그런 요조에게는 필시 이런 말을 건네주고 싶다. 요조, 네가 나쁜 게 아니야. ‘세상’이, ‘호리키’가 나쁜 거야.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어도 돼. 이렇게 말하며 그저 요조를 안아주고 싶었다.

샛길을 이야기하며 찾은 약국에서 만난 한 여성에게 자신과 동일한 불행이 존재함을 알아차리고 둘은 마주보며 눈물을 흘린다. 술에 의지하고 있는 요조에게 술을 그만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여성은 요조에게 각종 약들과 모르핀 주사액을 건넨다. 걱정에서 비롯된 호의가 요조를 모르핀에 중독되게 만든다. 다행히 술은 끊었지만 또 다시 모르핀에 중독되고 만 요조는 약국의 여성이 말리는 것을 무시하고 늘 약을 받아가고 만다. 약품을 얻고 싶은 일념에 춘화 모사를 시작하고, 약국 부인과 추한 관계까지 맺고 마는 요조.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에게 자신의 상황을 편지에 담아 보내지만 상황은 더 나빠지고 만다. 넙치와 호리키가 등장해 요조를 병원으로 데려간 것이다. 요조는 그저 요양소일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의심 없이 따라가지만, 그곳은 정신병원. 요조는 자신이 ‘인간 실격’이라고,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 다들 요조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가. 손을 뻗어 요조의 손을 잡아주고, 팔을 벌려 요조를 안아주지 않는가. 왜 다들 벼랑 끝까지 요조를 몰아세워 결국엔 저 아래로 떨어지게 만드는가. 세 번째 수기 결말 부분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다들 몰아세우지, 안아주지 않고.

읽는 내내 자전적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라고 칭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다자이 오사무의 삶 그 자체를 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표지를 열자마자 눈에 보이는 작가의 정리된 삶을 읽지 않고 책을 읽었더라면 이런 감상을 얻진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짧막한 단편 ‘직소’가 나와 있는데, 기독교를 믿지 않고 성경 한 번 읽어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베드로, 마리아, 유다, 야고보, 요한…… 그저 낯선 이름들. 하지만 손바닥 뒤집듯 휙휙 바뀌는 유다의 심리가 잘 서술되어 있다. 그저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고, 아무런 대가도 필요 없다고, 말하다가도 다른 사람들 손에 죽느니 그냥 내가 죽이고 말겠어, 하는 것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발을 씻겨주는 그분의 손길에 감동을 받아 내가 어떻게 당신을 팔아넘길 생각을 했지, 나는 절대 그러지 않아, 하다가도 그분에게 자신의 생각을 간파당하고 또 지목당하니 곧바로 달려가 은 삼십 냥에 그분을 팔아넘기고 마는. 유다의 어리석음과 배금주의적 성향이 현대사회의 모습과도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돈에 죽고 돈에 사는 여러 사람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 나는 이 사람이 좋아, 하다가도 작은 계기 하나에 옳다구나 싶어 금방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마는 사람들.

다자이 오사무의 글은 고전 소설이라고 불릴 만큼 오래된 소설이지만,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서술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왜 젊은 청년들이 이 책에 열광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나 역시 다자이 오사무에게 반해버렸다. ‘인간 실격’은 그가 살아생전 느꼈을 외로움과 고통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