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일 2009년 3월 6일

발을 맞추어서 나란히 걷는 그들의 희망에 넘치는 행렬 앞에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눈은 반짝였다. 고됐던 지난날들은 잊는 것이다. 낡은 북호텔을 임대하며 호텔 사업으로 한몫 크게 당기려는 르쿠브뢰르 부부. 경영이란 걸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임대할 호텔 옥상에서 바라본 파리의 아름다움은 주저하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부부의 상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삶의 의미를 찾은 듯 부부는 밝게 웃는다. 북호텔, 그리고 호텔의 이용객들과 함께할 밝은 미래를 꿈꾸면서, 북호텔을 통해 모든 것이 다 변할 것이라 굳게 믿으면서.

불안정하고 덧없는 인간들이 의지할 곳을 찾고 있는 마흔 개의 방들 한가운데 선 르쿠브뢰르의 주위는 온통 침묵이었고 휴식이 있을 뿐이었다. 몸 하나 편하게 누일 곳 없는,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장소 없는 파리의 노동자들에게 북호텔은 어떤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을까.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그리고 쌓인 피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아니었을까?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중요성은 투숙객들의 태도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 공간을 만드는 게 보통 일이 아님을 알기에 르쿠브뢰르 부부의 고충도 알 수 있다. 불안정하고 덧없는 인간들이 의지할 곳은 북호텔이었으니까.


숙박인들에게 방은 무엇인가? 잠을 자기 위한 곳 아닌가. 그 이상은 아니다. 방이란 나만의 공간이다. 나만의 ‘슈필라움’을 마음껏 만끽해야만 하는 곳, 나만의 ‘슈필라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곳. 그런데 그곳을 단지 잠을 자기 위한 곳으로 단정해 버린다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 지루함만이 반복되는 삶에서 진정한 휴식을 선물할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가 될까? 인간의 권리를 지켜주어야 하는, 적어도 사람이 살 수 있고 살 만한 공간으로 느껴지게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게 바로 르쿠브뢰르 부부가 북호텔을 경영하며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루이즈는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랐다. 3년간의 호텔 경영은 루이즈가 체념하고 인생을 받아들이도록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북호텔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편을 들어주는 데 머뭇거리는 루이즈. 북호텔의 손님이 가해자고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북호텔이다보니 호텔 일에 대해서는 한없이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체념하는 것을 배웠다는 루이즈의 고백이 참 슬프게 다가온다. 체념이란 자고로 포기를 뜻하는 것이니.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거라는데. 북호텔 임대와 호텔 경영이 그리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체념할 수밖에 없도록 루이자를 밀어붙인 거니까.


그녀는 가까운 몇 해 동안의 노력이 없어져 버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과거가 조각조각 사라져 버렸다. 숙박인의 이름들이 떠올랐다. 그들 하나하나에 덧붙여진 추억이 되살아오는 것이었다. 북호텔은 르쿠브뢰르 부부에겐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었으나 다른 투숙객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북호텔의 철거가 결정되자 무심하게, 그 어떤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고 북호텔을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북호텔이 철거되기 시작하자, 옛날 찬란했던 순간들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듯 루이즈는 허물어져가는 건물을 바라보며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기억 너머로 북호텔은 그렇게 사라졌다.

북호텔이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이 오고가며 만들어진 이야기와 사건들을 담은 책, <북호텔>. 북호텔에서 벌어진 일들이 언제나 밝고 활기찬 것은 아니다. 때론 슬픔이, 때론 체념한 어두운 분위기가 북호텔에 감돌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삶의 일부인데, 어쩌겠는가. <북호텔>이 끝나갈 무렵 함께 허물어진 건물 북호텔. 북호텔에서 많은 추억을 안고 떠난 사람들이 훗날 그곳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내가 그곳이 그리울 때마다 <북호텔>을 꺼내 읽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