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1

<더데빌>이라는 뮤지컬이 있다. 뉴욕 증권가에서 일하며 아내와 행복한 삶을 누리다 대공황으로 인해 곤경에 빠진 존 파우스트를 X-화이트(선한 존재)와 X-블랙(악한 존재)가 서로의 길로 존 파우스트를 인도하려 하는 과정과, 그 앞에 선 존 파우스트의고뇌를 담은 작품이다. <파우스트>1부를 원작으로 각색한 뮤지컬인데, 각색 과정에서 배경이 독일에서 뉴욕으로,  파우스트의 직업은 학자에서 증권 거래인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탄생한 <더데빌>의 주제는, ”빛과 어둠은 함께이니 그 선택은 인간의 몫.” 이다. 반면 <파우스트>의 주제나 선악을 바라보는 관점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원작을 읽게 되었다.

<파우스트>1부는 <더데빌>과 다르게 악을 저지하는 선은 오로지 파우스트의 양심뿐이다. 즉, 직접 나타나서 파우스트를 악의 세계로 유혹하는 메피스토펠레스와 다르게 선의 세계로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대부분의 인간이 어둠을 항상 ‘적’ 처럼 구체적인 개념으로 대한 것에 비해 빛은 ‘좋은 것’,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 정도로, 우리가 평가하는 것에 비해 평면적인 이해를 해왔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어둠은 ‘적’처럼 의인화 되어서 ‘인물’의 개념으로 인식 되어 온 반면, 빛은 ‘우리가 안주해야 하는 곳’ 처럼 ‘공간’의 개념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다. 이처럼 우리의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은 동일선상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파우스트에게 온 메피스토펠레스는 공간을 방문한 새로운 인물이다. 새로운 인물은 공간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의지는 있으나, 새로운 것을 탐구하지 못하는 인물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익숙함에 익숙해질수록 새로운 것을 오히려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상한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움을 찾으려고 오히려 눈을 치켜뜰텐데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이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 사실이고, 여기서부터 파우스트의 일이 시작된다.)
물론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파우스트의 과오는 아니다. 그는 단지 학자로서 세상의 수많은 지식이라는 이름의 설들을 깨우쳤을 뿐이다. 파우스트의 실수는 세상의 설들을 그대로 믿었다는 것과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낮춘 것이다. 세상의 설들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그 누구라도 이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다. 익숙함이 그를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인물, 감정으로 인도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아직 불변의 진리를 얻지 못하였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평면적으로는 학자의 고뇌를 드러내어 스스로를 끝없이 낮출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교만이 숨어 있다. 스스로가 인식하든 아니든 말이다.
파우스트의 이러한 실수들은-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나이가 든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거나 할 수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굳이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접근의 기회를 준다. 그런 사람들은 선한 방식으로, 예컨대 그들과 언쟁을 벌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유로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세력이 정말 ‘악’이라는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과오로 인해-물론 본성적인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인격체로 되었을 때 누군가에 의해 범해진 과오일 것이다-누구든 접근하기 쉬운, 소위 ‘연약하다’고 표현되는 인간상이 되었을 뿐이고,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에게 단지 다가갔을 뿐이다. 연약한 인간에게 다가가는 존재가 무조건적으로 악인 것은 아니다. 그가 파우스트를 유혹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다가갔으므로 악이라고 보는 시선들이 많다. 그러나 희곡에 X-화이트처럼 선한 존재 역시 그와 함께 등장해 파우스트를 자신의 세계로 유혹하려 했다면, 사람들은 그 존재 역시 유혹하는 존재라고 여겼겠는가?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에게 가하는 것은 유혹이며, 선한 존재가 파우스트에게 가하는 것은 인도인가? 우리는 어둠에 정복당하거나 이끌려 갔다가 다시 빛으로 오면 돌아온 탕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