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종교는 열정이며 시간이 나의 유일한 교리입니다.

단 하나에 빠져 있을 때에는 이면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열정이 독사에 비유되었던 것인가? 하지만 나는 독사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을 많이 봐 왔고 그 독사는 전혀 독이 되지 못한다. 슬픔이 따라온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보잘것 없는 것에는 슬픔이 따라 붙지 않는다. 사강이 사랑이 아니라 열정을 믿는다면-그는 어떤 인터뷰에서 그렇다고 답했다-그 근거는 이것이였겠는가? 열정도 슬픔이 따르므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인가?

예전의 나는 사강을 비웃었다. 사랑 없는 열정의 필요성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사강이 지나치게 현실에 메여 있었기 때문이였다. 나에게 있어서 몽상은 현실보다 중요하게 작용하였고, 사랑은 몽상이였다. 그러나 열정은 아니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연민을 느낀다. 사강이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냐고 묻고 싶다. 사랑은 몽상이지만 사실 몽상의 한 부분이다. 몽상의 전부가 아닌, 일부조차 느낄 기회를 누군가에게는 전혀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잔인하다.

열정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지만, 목적이 되지 못한다. 젊음의 패기로, 또는 기분 좋은 감정으로 태어난 넘치는 열정조차도 쏟아야 하는 곳이 정해져 있다. 틀이 있어 틀에 맞추어야만 하고, 맞추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는,오히려 해를 입게 되는 것이 열정이며, 이것은 슬픈 사실이다. 과거의 열정은 무대 뒤의 배우였다. 우리는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연민을 느꼈지만, 정말로 그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열정은 신전의 동상이며, 십자가가 되었다. 틀을 후광처럼 두르고 있는 열정의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누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실주의자는 비웃을 수 있고 동정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교도야말로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