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그리고 나의 초상! 비스코비츠

- 남극의 밤, 우리는 바다를 떠도는 유빙 위에 단둘이 있었다. 비스코비츠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우리 대화를 글로 남겨 줬으면 좋겠어.”

“불가능해. 난 타이피스트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야. 난 펭귄이야.”

 

프롤로그 네 번째 줄에서부터 빵터졌다.

생각지도 못한 대상에 당황해 웃음이 터졌다. 계속해서 웃을 줄만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처음엔 웃었다가 정색했다가 다시 웃는다. 내용의 심각성에, 웃었다는 사실에 정색하고는 다시 웃는다. 희극과 비극이 널을 뛴다. 계속 참신했다. 이렇게 참신할 수도 있구나, 감탄이 나왔다.

 

각 장의 모든 비스코비츠는 사랑을 한다. 그 대상이 리우바가 됐든, 다른 누구가 됐든, 자기 자신이 됐든 계속 사랑을 한다. 동물의 사랑을 하지만, 사람과 다른 점은 없다. 표지에서부터 넌 동물이야! 라고 외치지만, 그리고 마지막에도 외치지만 동물 사회에서 그들은 눈에 띄는 몇 가지 본능적인 것만 제하면 인간과 다를 게 없다. 그들만의 사회 속에서 사람처럼 욕망하고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애쓴다. 욕망을 누르기 위해,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사람처럼 어리석게 행동한다. 사람도 동물이라는 걸 잊고 있다가 이 책으로 다시금 상기시킬 수 있었는데 그 과정이 재밌다. 중간중간 어쩔 수 없는 웃음이 난다. 동물에 빗대어 우리삶을 이야기하는 우화, 겠다.

-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나를 괴롭힌 것은 죽는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 복부의 모양이었다. 마치 유충 같았다. 나를 죽인 건 내 동상이 아니라 주코틱의 동상이었다. 내가 역사에 남긴 것은 황제의 초상이 아니었다. 아무 쓸모 없는 존재의 초상이었다.[p103_이름이 나쁘구나, 비스코비츠]

    

- 아,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녀는 직관처럼 매력적이고, 반어법처럼 아찔하고, 진실처럼 수줍었다. 시처럼 어리석고.

난 그녀에게 말했다. “난 비. 스. 코. 비. 츠. 야.”[p74_길을 찾아냈구나, 비스코비츠]

사랑을 위해 자유와 본능을 간절히 억누르기도 하고, 처참하게 패하기도 하며, 예정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는 불행에 맞서고, 심지어 그 불행을 원하고 기다리기까지 하지만 예상했던 불행(혹은 행복)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했던 대로 이뤄지는 법이 없지만 어느 때는 당연하게도 예상했던 대로 흘러간다. 인생에 대한 불가능한 예측으로 피로가 쌓이고 각 장의 동물에 대입되어 여러 삶을 겪고 나니 진이 빠진다.

 

기억에 남는 장이 많지만, 표지가 앵무새라 앵무새가 나온 장이 머릿속에 오래 맴돈다. 앵무새가 나온 편의 마지막, 작가가 의도적으로 사용한 말줄임표의 끝은 평서문이었을까, 의문형이었을까. 후자였다면 비스코비츠가 곧 미치진 않았을까. 살면서 그런 상황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외치는 말이 허무하게 되돌아오고 어쨌든 물음에 대한 답은 들었으나 찝찝함이 가시지 않을 때, 그런 상황에 대해 해답을 내려줄 이조차 부재한다면 삶을 계속 살아갈 의지는 사라지지 않을까. (표지, 편집의 중요성이란!)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천국에서 살 수 있으니까.[p122_마음의 안정을 찾았구나, 비스코비츠]

- “꾸물거리지 마요, 내 사랑, 나는 조용히 즐기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자유를 만끽하며 강렬한 섹스를 나누는 걸 좋아해요.”

그러나 나는 물고기로서는 낯선 행동, 키스를 했다.

그날부터, 그녀가 종이로 만든 물고기일 뿐이라는 걸 깨달은 날부터, 우리 관계는 더 편안해졌고, 대화는 쉬워졌으며, 섹스는 환상적이었다.[p83_적게 말할수록 좋아, 비스코비츠]

 

모든 인간에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무조건적으로 내재된 나르시시즘이 달팽이 편에서 극대화된다. 에고이즘인지 나르시시즘인지 둘 다인지 어떤 모호함인지 어쨌든 잘 모르는, 그러나 내가 얼마나 갖고 있을지 모를 그런 성향이 가득한 비스코들은 읽으면서 희한하기도 재밌기도 했는데 그런 재미를 느끼면서도 종종 동물들의 삶에서 내 안의 패러다임이 깨지고 전율이 일었다. 그래서 재밌고 계속 새로웠고 이 작가는 천재야! 를 굳센 믿음으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