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1월의 어느 날 비가 추적추적 오는 파리의 거리를 우산도 없이 걷던 내가 생각나고, 몇 번의 연애를 끝내고 난 뒤 슬픔과 상실감보다는 체념이 먼저였던 내가 생각이 난다. 내가 놓아야만 끝이 나는 연애는 언제나 붙잡고 있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끝이 보이지만 끝나지 않는 관계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폴도 마찬가지다. 몇 번의 사랑과 이별로 사랑과 사람에게 지친 폴은 지금 만나는 로제에게도 그 어떤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이미 폴에게 사랑이란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사라지는 것일뿐. 매번 다른 여자들과 외도를 하고, 연인에게는 뒷전인 로제를 알면서도 폴은 기다리고, 체념하고, 또 기다린다. 그런 폴에게 어느 날 시몽이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시몽의 말처럼 폴은 로제에게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로제는 일주일에 한두 번 기계처럼 폴의 집에 들르고, 폴의 물건을 망가뜨리거나 가져가고, 다른 여자들을 몰래 만나곤 했다. 이 모든 걸 알면서도 폴은 그 어떤 말이나 행동도 로제에게 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고, 체념하고 또 기다릴 뿐이었다. 폴에게 시몽의 적극적이고 뜨거운 구애는 새로웠을 것이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 나, 나를 사랑해줘 하고 말입니다.

시몽은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다. 직업이 변호사인 만큼 일할 땐 이성적이지만 본인의 감정에 충실하고 사랑하는 폴에 관해서는 솔직하고 직관적이다. 무신경한 로제에게 지친 폴에게 시몽은 굉장한 자극제였고 그녀가 아무리 부정해도 결국은 그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 6시에 플레벨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렇게 시몽은 마치 운명처럼 폴의 마음에 들어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 짧은 한마디가 앞으로 그들의 관계에 기폭제가 되었다.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 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질문은 마치 마법 같았다. 폴이 그녀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녀의 자아를 살아나게 해주었다. 그녀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고 마치 스무 살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폴에게 시몽이란 자신의 잃어버린 자아를 상기시켜주는 존재였다. 이 책의 제목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인 이유도 이것이 아닐까? 말 그대로 시몽은 정말이지 ‘마음의 현을 울렸다’

하지만 폴에게 시몽은 그녀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처럼 불완전하고 그저 꿈같은 환상처럼 느껴진 것 같다. 로제에게 향하는 사랑은 여전히 지치고 외로운 기다림의 연속일지라도 익숙하고 안정적이고 내가 놓지만 않으면 끝나지 않을 관계라는 걸 폴은 알고 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내가 이 책을 20대 초반에 읽었다면 폴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시몽이기도, 폴이기도, 로제이기도 했다. 때때로 사랑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 노력, 자존심 등이 합쳐진 복합적인 무엇인 것 같다. 폴이 로제에게 느끼는 감정도 그런 게 아닐까. 열정적인 사랑과 행복보다 노력과 자존심을 택한 그녀를 과연 어떤 시선에서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