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늙었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낡은 것들 뿐이었다. 다만 그의 두 눈만 빼고 말이다’

바닷가 마을에 노인이 있었다. 가진 것은 모두 낡았다. 가족도 없는 그에겐 남루하고 늙은 몸과 그만큼 비루한 집과 고기잡이 도구만 있을 뿐이었다.

노인에게도 거칠 것 없었던 한세상이 있었다. 건장한 흑인과 팔씨름을 하느라 밤을 지새우며 끝내 이겼던 당당한 추억도, 바다에서 크고 좋은 놈을 낚던 자랑스러운 추억도 있었다.

노인은 여러 날 물고기를 낚지 못했다. 그래서 노인 곁에서 일을 하던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고기잡이 배를 타야 했다. 홀로 노인의 고기잡이는 계속 됐다. 노인은 늙었지만 큰 물고기를 잡는 꿈이 있었다.

망망대해에서 고기잡이로 힘들 때 노인은 계속 다정한 그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애가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것을 봐도, 힘이 들어도 노인은 그 소년을 떠올렸다. 천신만고 끝에 큰 고기를 잡지만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들에게 한점, 두점씩 빼앗겨 결국 노인은 청새치의 머리와 뼈만 가지고 도착했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나는 늙는다는 것도, 인생이란 어려운 말도, 어부의 고기잡이라는 행위에 얽힌 이야기도 잘 헤아리지 못했다. ‘인간은 파멸할 순 있어도 패배할 수 없다.’ 라는 책 속 유명한 문장의 뜻을 이해하긴 더더욱 어려웠다. 그저 바다에서 벌이는 노인의 사투, 그 의지가 대단해 그런 마음을 본받고 싶다는, 지극히 상투적인 이야기만 독후감상문에 썼을 뿐이었다.

5년 전 두 번째 읽을 때는 가난하고 외로운 한 인간의 모습에 마음이 쓰였다. 바다에서 노인이 혼잣말의 후렴구처럼 반복하는 ‘그 애가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이 ‘네가 곁에 없어서 정말 쓸쓸하다’로 들렸다. 바다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노인에게 가진 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세 번째 읽은 지금, 한문장씩 읽으면 짧고 현실적이고 건조한 헤밍웨이의 문체가, 한 문단 한 문단씩 이어질수록 거대한 울림으로 변한다는 걸 느낀다.

전쟁과 냉전이 한창이던 1940-50년대의 이 바닷가에서, 노인과 청새치는 서로 사투를 벌이지만, 노인은 청새치를 적대자로 여기지 않았다. 작은 새, 날치, 청새치 등 바다에서 볼 수 있는 생명을 노인은 친구나 형제로 생각했다. 어부의 숙명인 ‘고기잡이’ 로 청새치를 죽이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연민을 느낀 노인은, 청새치가 상어에게 습격을 받을 때 마치 자신이 습격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항구로 돌아갈 땐 자신이 청새치를 인도하는 건지, 청새치가 자신을 데려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바닷가 마을에서도, 바다에서도 노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바다의 생명이, 노인을 돌보는 소년이, 음식점 주인이, 노인을 걱정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노인들은 눈이 흐릴 것이고, 기력이 없을 것이고, 꿈을 꾸긴 어려울 거라는 건 젊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나는 20대의 오만으로 오독했다는 생각을 하며 부끄러워졌다.

노인이 돌아오기까지 이틀 동안 서로 그리워하던 노인과 소년은 소년의 부모가 뭐라든, 노인의 운수가 어떻든 다시 고기잡이를 함께 하기로 했다. 대가리와 뼈대만 남은 청새치는 손에 쥘 듯 했지만 빠져나간 노인의 꿈을 상징하지 않는다. 노인의 나쁜 운수와 무능력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승자와 패자, 성공과 실패로 나누어 인물의 행위를 판단하는 게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