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코트 일가와 휠라이트 일가, 코핀 일가와 슬레이터 일가, 로웰 일가와 캐벗 일가와 세지윅 일가와 킴볼 일가(그래, 심지어 킴볼 일가까지도.)는 모두 자신들의 족보를 조사해 책으로 만들었다. 이제 왑샷 일가의 차례다. 그들은 자신들과 과거가 항상 함께 고려되기를 바랄 것이다. 결혼으로 일가가 된 친척이 가계를 추적해 노르만 족 시조인 뱅크르-쇼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뱅크로-쇼에서 팬쇼, 웨이프쇼, 왑섀프티스, 왑샷티스, 왑샷으로 이어지는 변천사가 노섬벌랜드와 노셋셔의 교구기록에 나타나 있다. 세인트보톨프스 사람들은 코감기에 걸린 것처럼 ‘왑샷’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 일가 중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지파의 시조는 1630년에 아벨라 호를 타고 잉글랜드에서 이주해 온 이지키얼 왑샷이다. 이지키얼은 보스턴에 정착해서 라틴 어, 그리스 어, 히브리 어, 플루트를 가르쳤다. 총독부에서 그에게 일자리를 제의했지만 그는 현명하게도 이를 거절했다. 이로써 300년 후 리앤더와 그 아들들의 운명을 희롱하게 된, 사려 깊은 사절이라는 가문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누군가는 이지키얼이 “가발을 혐오했으며, 영연방의 안녕을 항상 꺼림칙하게 생각했다”고 썼다. 이지키얼은 데이비드, 미카바, 아론을 낳았다. 이지키얼의 장례식에서는 코튼 메이서가 추도사를 했다. 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