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와 죽을 때

모든 소설은 작가의 삶 속에서 나온다지만, 전쟁을 겪은 자의 소설 속엔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트라우마와 그 어떠함이 있다.

배경은 2차 세계대전 끝날 무렵. 독일군이 후퇴하며 나치 정권이 파국으로 향하는 때 독일병 그래버가 3주의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간다. 그곳에서 엘리자베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전시의 현장감이 너무너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처참함이라는 말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니까. 이 말도 안되는 광경을 작가는 감정 없이, 끝도 없이 나열한다. 눈물 포인트는 별로 없으니 울보 분들은 걱정 마세요. (제가 울보)

읽던 중,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전쟁의 피해자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 그러나 ‘지배자’ 였던 일본군 중 누군간, 살인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렸을 수도 있다. 전쟁에 참가하지 않으면 가족들이 피해를 봤을 수도 있다. 그래서 외면해 버렸을 수도 있다. 이들은 과연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내가 그 위치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주인공 그래버는 이 모든 것을 외면했다. 그러다 고향에 돌아가 러시아군에 의해 폐허가 되어버린 자신의 집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p123) 나는 폐허들을 수 없이 보아 왔어. 하지만 진짜 폐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오늘에서야 진짜를 본 거야. 바로 이 폐허를. 이것은 다른 폐허들과는 달라. 왜 나는 저 아래 누워 있지 않는 걸까? 나는 저 아래 누워 있어야 마땅해. /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것들. 독일군에 의해, 또 자신에 의해 감당해내야 했던 러시아인들의 참혹한 슬픔을 본인이 겪고서야 진짜를 알게 된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그래버를 비난할 수 있지만, 나라고 외면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까ㅡ

작가 레마르크는 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오랫동안 스스로를 옭아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놓지 않으려 했던 그래버의 모습에서 작가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p534) “살인자.“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슈타인브레너를 들여다보았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살인자.“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것은 슈타인브레너와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절규였다. /

자신을 향한 절규. 작가 자신 아니었을까? 많은 반전 소설을 탄생케 했던 작가 레마르크는 이렇게 글로써 무거운 짐을 덜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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