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 않는 생각, 절대 퇴색하지 않을 기억의 인생소설

소설책을 받아들고 들뜬 마음으로 책장을 열어본 기억이 새로울만큼 반가운 작품이다. 근작(近作)인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으며 내내 먼저 읽어보았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남아있었기에 한권에 묶여 새롭게 출간되자 냉큼 구입했다. 구덩이와 메마른 우물, 아내의 사라짐, 난징학살과 노몬한 전투와 같은 두 작품 여러 소재의 상징적 유사성을 살펴보고자하는 욕구 때문이랄 수 있다.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딛고 있음에도 몽환적인 세계를 넘나들며 삶의 내면 저 밑바닥에 침잠해있는 어떤 진실을 모색케하는 솜씨는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는 듯하다.

 

매일 아침 나무 위에서 끼이이익 하며 이 세상의 태엽을 감는 새, 출구 없는 골목과 방치되어 퇴락한 빈 집 마당의 날지 못하는 새의 조상(彫像), 깊디 깊은 물 없는 우물이 자신의 이미지 없음을 중얼 거리는 실직한 서른 살 남자의 왠지모를 무력(無力)과 무념(無念), 삶의 시간이 진행되지 못하고 멈춰버린 듯한 낯선 세계와 겹치면서 은폐되어 있는 길고 긴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아내 ‘구미코’와 같이 기르던 그녀의 오빠 이름을 붙인 사라진 고양이 와타야 노보루를 찾아 나서는 ‘오카다 도오루’ , 그리곤 우연히 마주하는 이웃의 열여섯 소녀 가사하라 메이, 물의 흐름을 말하며 ‘몸의 조성’이라는 기묘한 예언을 하는 가노 마르타, 크레타 자매, 인간을 밟고 서야 정상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신념 속에 성장한 에고이스트 와타야 노보루,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인의 관능적 전화, 중일 전쟁과 외몽골 접경 노몬한 전투의 생존자인 마미야 중위에 이르기까지 「도둑 까치」라는 표제의 1부는 거대한 서사의 시작을 알리는 다채로운 인물들을 통해 그만큼의 삶의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을 예견케 한다.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는 인생에 길들면, 끝내는 자신이 뭘 하는지 그것조차 모르게 된다.”는 오카다의 자조(自照)는 서른 살이고, 걸음을 멈췄으며, 자기 이미지도 잃어버린 남자가 찾아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려는 여정일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귀 밑에 시원한 향취의 낯선 향수 내음을 발산하는 아내의 원피스 지퍼를 올려주었던 날 아내는 직장에서 돌아오지 않고 이내 사라져버리고, 결혼 후 어떤 대화도 없던 처남으로부터 이혼의 권유를 받기까지 한다.

 

남자는 아내의 가출 이유를 알지 못한다. 2부 「예언 하는 새」는 그래서 텅 빈껍데기 같은 인생, 죽은 것처럼 멈춘 삶, 정지되어 버린 듯한 삶의 흐름을 재개할 수 있는, 살아가야 할 진정의 의미를 찾는 행로가 된다. “인생이라는 행위 속에 빛이 비추는 것은 한정된 아주 짧은 기간뿐입니다. 어쩌면 불과 10여초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 시간이 지나버리고 나면, 그리고 그 빛이 보여주는 계시를 포착하지 못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인생의 조언은 남자를 메마른 우물로 향하게 한다.

 

나무에 줄사다리를 풀리지 않게 묶고 어두운 심연의 바닥으로 내려간다. 반쯤 남은 우물 뚜껑 밖으로 비치는 반달의 형태를 올려보며. 도오루는 진정 찰라의 빛 속에서 삶의 이미지를 발견 할 수 있을까? 3부 「새잡이 사내」에 이르면 전희(前戲)처럼 가사하라 메이의 발칙한 행위가 소설적 긴장으로 이끈다. 비로소 로시니의 오페라 《도둑까치》의 얄궂은 행동과 교차하면서 진실과 의미의 굶주림과 갈증을 풀어준다. 아마 많은 이들에게 ‘인생 소설’로 남겨질지도 모르겠다. “절대 늙지 않는, 결코 퇴색하지 않는 기억”이 되어줄 작품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