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8.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2758. 알렉산드르 이자에비치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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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 또는 슈호프라고도 불리우고, [췌-854] 라고도 불리우는 한 남자가 있다. 늙고 – 정확히는 늙어가고 있고 – 야위고 치졌으며 떳떳한 듯 하면서도 자세히 보면 언제나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남자가 있다. 그저 한끼 식사로 나오는 빵이 300그램이냐 혹은 250그램이냐 하는 따위의 문제에 집중해 멀리도 볼 것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런 남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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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작은 사회를 이루고 있다. 어떤이는 해군 함장 역할을 하던 사내로 수많은 해군을 거느리고 거대한 전함을 말 한마디로 움직였으며 또 어떤 사내는 한때 영화 감독이였거나, 정치적 인물인 이도 있고, 살인자나 간첩도 있다.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통해 슈호프와 함께 수용소 내의 수많은 인간 군상을 그리고있다. 어떤 이는 십년을 살아야 하고, 어떤 이는 수십년을 살아야 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솔제니친은 그 많은 세월 많은 이야기들을 드라마틱하게 구성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버티는 단 하루간의 이야기를 책 한 권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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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호프가 사는 오늘은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지난 8년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된 지극히 평범한 하루다. 특별히 나쁠 것도 그렇다고 매우 좋은 일도 없는 그런 날이다. 그래도 오늘은 운수가 조금 좋은 날인 것 같다. 영창에도 가지 않았고 평소보다 거친 노동을 하지도 않았으며 죽 한 그릇을 더 얻어 먹은 것은 그야말로 운수대통한 것이다. 이런 보잘것 없는 일들도 수용소에선 그럭저럭 운이 좋은 하루라고 할 수 있겠다. 새벽 동이 틀 무렵 수용소 내무반의 천장에는 여전히 희뿌연 성애가 끼어 있고 축축한 바닥과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을 만큼의 추위가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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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읽는 내내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고전이라 해서 굉장한 무언가를 얻어가려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책에 몰입하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은 오직 슈호프의 하루가 끝나기를 바라는 것과 조금 더 보태자면 그저 무사안일하게 하루가 지나가는 것 뿐이다.

나는 그랬다. 슈호프가 너무 좋은 일을 마주하도록 기도한 것이 아니라 지난 8년과 다름 없을 아주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으로 하루가 끝나기를, 그러하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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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 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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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러시아판 김첨지를 만난 느낌이었고 <운수 좋은 날>을 다시 읽는 느낌이었다.

죄목도 제대로 모른채 하루를 버티는 그들을 보면, 지금 우리가 겪는 시대적 아픔, 슬픔, 상실 이나 불평등, 불합리, 부조리 이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저 기계가 되어 하루를 보내고 그러는 내내 이 하루가 또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는, 더 좋을 필요도 없이 딱 지금처럼만 하루가 지나기를 기도하는 수용소 포로들을 보자니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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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한 개피가 소중해지는 날이다. 밥 한 그릇이 소중하고,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소중해 지는 날이다. 그리고 언제나 사랑스러운 아내가 유난히 더 사랑스러운 그런 날이다. 이 책은 나에게 그만큼이나 소중하고 값진 책이다. 읽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서점에 가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