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일 2011년 3월 18일

2753. 알베르 까뮈 『이방인』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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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된 삶에서의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뫼르소가 엄마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한통의 편지를 양로원으로부터 받으며 <이방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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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는 감정선의 일부가 침몰된 것처럼 암마의 부고 소식에도 여느때와 다름 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언젠가는 떠날 것을 알았기에 그것이 슬프지만은 않았다는 뫼르소는 그러나 후일 판사의 물음에 슬픔대신 그리움으로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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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원에서 치뤄진 장례식에서 뫼르소는 당장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보다도 부족했던 잠이 그리웠고 따뜻한 밀크 커피 한 잔이 생각 났으며 담배 한 개피가 절실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엄마의 곁에서 양로원 사람과 함께 밀크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한 개피 물었으며 슬며시 잠들었지만 결코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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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뫼르소는 ‘그날의 태양’을 떠올리며 바다를 거닐다 오래전 함께 일하며 마음에 두었던 그녀, 마리와 우연히 재회하게 되고 젊은 날의 뜨거운 만남은 이야기 속에서의 우연을 가장한, 어쩌면 필연으로 다가온 인연으로 발전하게 된다.

마리는 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확인하려 하지만 뫼르소에게 사랑 같은건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것 같다.’ 라는 말로 답한다. 반대로 결혼에 대한 물음에는 ‘좋아.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이라는 말로 화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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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은 청년 뫼르소가 무심함 속에 엄마를 보내고, 무심함 속에 사랑을 이루며, 그런 무심함으로 일관된 삶 속에서 친구 레몽으로부터 휘말린 작은 사건으로 인해 살인범이 되는 과정을 1부에서 그리고 있다.

뫼르소가 살인범이 되어가는 과정 같은 것은 중요치 않다. 어쩌면 그 이유나 원인도 중요치 않다. 그것은 분노도, 슬픔도, 위협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어쩌면 뫼르소의 말처럼 ‘이 모든 것이 그날의 태양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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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2부에서는 사건 이후, 재판 과정과 형무소에 갇힌 뫼르소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전히 담담한 뫼르소는 재판 과정 내내 일반인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수심의 평화를 누린지도 모른다. 그는 일상에서 느끼던 무료함이나 형무소에서 느끼는 무료함의 차이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 어쩌면 그에겐 자유를 빼앗긴다는 의미보다 그저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여성의 몸을 마주할 수 없었고 담배를 입에 물 수 없었다는 것이 더 문제 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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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에 다다를 때까지 타인에게도 또한 자신에게도 덤덤했으며 무관심했던 뫼르소가 마지막 순간에 폭주하는 장면을 수없이 읽으며,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 것만 보아도 알베르 까뮈가 문학의 정점에 올랐다는 평에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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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때론 ‘불편한 관심’ 보다  ‘편안한 단절’을 원하기도 한다. 어쩌면 뫼르소는 우리보다 조금 더 많이 ‘ 편안한 단절’을 원해 왔던 것은 아닐까. 내가 지속적으로 <이방인>을 읽는 이유는 바로 뫼르소의 감정선에 공감하는 바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나의 감정 말이다.

십년 전 아버지의 장례식이 그랬다. <이방인>에서의 그 날처럼, 나는 여전히 피곤했고, 허기가 졌으며, 그리움은 있으나 슬픔은 없었다.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 흘릴 수 없었던 –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매우 불편했던 기억이 여전히 가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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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단절’을 원했을지 모를 뫼르소는 보통의 사람들에 비해 말수가 많이 적은 편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흔히 내성적이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입을 다물었을 뿐,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때론 나 역시 입을 다뭄으로서 가장 많은 말을 할 때가 있기에 어쩌면 내게 <이방인>이란 작품, 그리고 뫼르소는 온전히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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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리 없겠지만, 만약 글을 모른다면 글을 배워서라도 반드시 만나야할 문학이다. 완독이 아니라 재독에 삼독에 사독을 해도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문학이며, 거듭할수록 더욱 더 재미있고 깊이 있게 다가오는 문학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