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7.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

1657.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  [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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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과 죽음, 그 중간 어딘가를 부유하며 우리의 내면을 보자. 과연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 인간은 무엇이고 어떻게 규정하며 어떠한 존재인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나를 보내지 마>를 통해 나에게 던진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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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캐시가 자신이 나온 모교 헤일셤에 대해 회상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1990년대 후반 영국, 어느 한적하고 너무나도 평범한 기숙 학교 헤일셤에서의 일상. 주인공 캐시와 개성넘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친구 루스, 엉뚱한만큼이나 재치 넘이치는 토미, 그리고 늘 엄격하지만 존경 받아 마땅할 헤일셤의 선생님들.

그렇게 시작되는 일상적인 이야기는 이 책의 중반 넘어서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헤일셤에서 있었던 청소년 시절의 성장기와 헤일셤 졸업 후의 이야기들. 이야기가 더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1부 이후에 헤일셤에서 졸업한 이야기를 다루는 2부에서는 무언가 나오겠지 하는 기대감을 져버리고 2부에서 역시 캐시와 루스 그리고 이제는 루스와 연인이 된 토미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회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아주 보편적인 우리네 모습임에도 특이하다 할 만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클론이라던지, 기증자, 근원자, 일반인, 간병사 등이 그러한 단어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일상적으로 던지는 대화속에 숨어있는 이 단어들은 독자로 하여금 전혀 놀랄 기색 없이 이야기는 진행한다. 후반부의 내용을 이야기하면 이 책의 가치가 매우 떨어질 수 있기에 줄거리는 여기서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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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페이지 가량의 장편 소설을 이렇게 느린 호흡으로 끌어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반에 이어 중반까지 매우 느린 템포로 읽힌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에는 SF라는 장르 덕에 뭔가 엄청나게 신선하고 상상치도 못한 장치들이 나를 기쁘게 해줄거라는 기대감에 젖어 있었는데 막상 책의 후반부에 왔을 때에도 이 책에는 전혀 SF스러운 면모라던가 노벨상의 영예에 어울릴 만한 품격 따위는 보여지지 않았다. 그저 쳥년들의 지루한 일상 이야기뿐. 대체 이 작가가 어떻게 노벨상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나를 보내지 마>에 실망할 무렵 나는 책의 후반부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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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이야기할 이 책에 대한 감상은 어쩌면 400페이지라는 꽤나 긴 분량 중 10분의 1도 차지하지 못할 후반의 몇 페이지를 넘기며 느낀 점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엔딩의 그 몇 페이지 덕에 나는 이 책을 평생 소장하고 몇 번은 더 읽어야겠다고 다짐했으며 평생에 읽은 책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작품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이 책은 분명히 SF 장르 임에도 화려한 우주선이나 달의 표면을 유영하는 멋진 우주인 따위는 없다. 아주 평범한 기숙 학교 헤일셤에서의 회상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그저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전혀 자극적이지 않게 그리고 눈치 채지 못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에 대해 알아주기를 바라는 대신, 작가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깨닫게 하는 방식을 택한 것 같다.

이 책이 진심으로 너무 좋은 것은 결코 이 책이 나를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 다는 점에 있다. 작가는 이해 대신 그냥 계속해서 보여주기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은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너무나도 잔인한 나의 모습,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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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너무도 큰 충격이다. <나를 보내지 마>는 문학으로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극명하게 되살린 작품이다. 책이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보다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준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나를 보내지 마>에 최고라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내 잊었던 많은 생각들을 후반부에 이르러 생각하게 하고 완독 후에도 한참을 생각했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

끝으로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꼭 한 가지 만은 기억하자. 인내해야 한다. 인내를 해야만 작가의 물음에 도달할 수 있다. 작가의 물음에 도달해야만 스스로가 질문할 수 있다. 그곳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이 책은 그저그런 성장 소설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