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악마

연령 17세 이상 | 출간일 2014년 5월 16일

요절한 천재작가로 알려져 이는 레몽 라디게의 대표적인 작품이 <육체의 악마>다. <육체의 악마>는 당대 유명한 작가들의 극찬을 통해 단숨에 유명세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레몽 라디게가 열일곱살에 작성했다고 알려진 이 소설은 정제되어있지 않은 날 것의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의 서술에는 그 어떤 포장이 들어있지 않다. 열 일곱살이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도 파격적이지만, 이 소설이 고작 열일곱살의 작가가 쓴 것이라는 데에 더 놀라움을 자아낸다. 내가 열일곱살일때에는 그저 학교에서 주어진 내용을 머릿 속에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 책에서 주인공이 사랑에 빠져서 느끼는 감정들은 아주 투명하다. 솔직하게 자신이 사랑에 빠진 상대를 질투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남자들이 흔히 생각은 하지만 통념상 드러낼 수 없는 생각의 단편들도 종종 만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마르트 혼자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그러한 급작스러운 변화를 나는 쉽사리 용서하려 들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나를 속인 것이었다면 나는 그녀를 더욱 용서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어떤 때엔 나는 마르트가 우리 사랑을 좀 더 지속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으며, 게다가 그 아이가 내 자식이 아니라고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P. ​124

​날 것과 같은 솔직한 심리 서술이 이 소설이 당대의 작가들이 그렇게 열광하도록 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출간된 이 후, 출간된 <도르작 백작의 무도회>는 소설의 완성도 면에서 <육체의 악마>를 뛰어넘는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직 한국에는 번역되어 나오지 않으 듯 하다.

작가, 레몽 라디게가 20살에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에 이르지 않았다면 더 좋은 소설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인상 깊은 구절

​P. 56

나는 내 우정에도 그런 애무는 허용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오직 사랑만이 여자들에 대한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한다는 사실에 나는 정말로 절망하기 시작했다. 사랑 없이 지낼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마르트에 대한 아무런 권리 없이는 결코 지낼 수 없으리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 개탄스럽다고 여기면서도, 사랑을 하기로 결심까지 했다. 나는 마르트를 갈망했는데, 그 사실을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P.76

조용한 죽음은 혼자서 생각할 때만 문제되는 것이다. 둘이서 죽는다는 것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조차 이미 죽음이 아니다. 괴로운 것은 생명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에다 하나의 뜻을 주는 것에서 떠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이 우리 생명일 때, 함께 사는 것과 함께 죽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P. 172

마르트가 없는 인생이란 하나의 기나 긴 항해와 같았다. 나는 목적지에 다다를 거인가? 마치 처음으로 뱃멀미를 겪을 떄, 항구에 닿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기를 바라듯이 나는 장애에 대하여 마음을 쓰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좀 덜해진 멀미가 나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육지를 생각하게 하는 여유를 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