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헤밍웨이의 글이 보통 그렇지만, 남성중심적이라 공감하기 힘들었다. 문제는, 주인공 제이크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므로 중심이 되는 인물에 공감할 수 없다면 읽기가 상당히 고문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드라마틱한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기에 내게는 더욱 고역이었다.

이 이야기가 남성중심적인 이유를 크게는 주제 / 전개 및 묘사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설에서는 이야기의 배경이 전후이므로 ‘길 잃은 세대’, 즉 방향감각을 상실한 방황하던 세대의 방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욕망이 있음에도 뚜렷하게 행동하는 것이 별로 없다.

이야기에서 남성 캐릭터인 제이크, 마이클, 로버트가 나누는 대화를 관찰하면 다양한 형태의 욕망들이 등장한다. 가장 주요하게는 이들의 패거리이자 주요한 여성 인물 브렛, 그리고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여행 이야기, 예술(특히 글쓰기), 낚시를 비롯한 취미 활동, 정착과 직업에서의 성공, 전쟁의 경험 등 다양한 형태의 대화가 등장한다. 하지만 브렛이 등장하면 대부분 대화의 양상이 다른 남성 캐릭터와의 관계에 머무른다.

문제는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브렛’은 다른 남성 캐릭터에 비해 그 욕망이라고 하는 지점이 뚜렷하지 않고 오직 대상화 되어 표현된다는 점이다. 그녀는 욕망을 좇는 캐릭터로 표현되고, 결국 어떤 남자를 선택할까 (혹은 특정 남성 캐릭터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정도가 가장 중요한 논의점이다.

욕망이 있음에도 다양한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 때문에 행동할 수 없는 인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 제이크는 전쟁의 상처로 인한 성 불구 / 마이클은 브렛과의 이전 관계와 로버트를 아니꼽게 생각하는 마음(인종문제) / 로버트는 인종 문제로 인한 컴플렉스와 우유부단한 성격 등 브렛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채롭게 묘사된다.

브렛이 각 인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 왔고, 각 인물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은 간접적으로조차 설명되지 않는다. 즉, 독자로 하여금 브렛을 이해할 만큼의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다.

또한 프랜시스라는 캐릭터는 로버트 콘을 기죽이고, 꽉 잡고 있는 기 센 여자친구 정도로만 묘사되고, 로버트 콘의 일방적인 이별통보로 사라져 버린다. 프랜시스에 대한 묘사 역시 제이크의 시점에서 묘사되기 때문에 평면적이며 영양가 없다. 결핍이라든가, 원하는 지점이라든가 그 캐릭터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지점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된다.

여성 캐릭터들이 이렇게 평면적이고 서사의 주체로서 행동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헤밍웨이 글이 보통 그렇지만 남성성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것 말고, 한 명의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는 것 -작가의 얕은 여성관에서 비롯된 한계-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원래의 제목은 ‘피에스타’라고 한다. 지금의 제목보다 이 제목이 더 본문의 내용을 잘 표현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작품 전반에서 ‘각자가 자신의 욕망을 좇느라 타인의 상황에는 큰 관심이 없는, 그리고 딱히 목적이 없는 오락거리의 향연, 집단적이고 질 낮은 쾌락’ 등의 이미지가 이야기와 훨씬 잘 어울린다. 또한 주제와도 더 잘 대응된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주제도 지질한 남성들의 사랑 놀음을 일방적으로 늘어 놓는 방식으로 전개되니 지루하게 느껴졌다. 또한 드라마틱한 사건이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갈등의 진폭이 얕은 이 작품은 정말 매력이 없었다. 의무감에 힘겹게 끝까지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