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하루키.
언제부턴가 일본작가의 소설은 읽지 않았는 데, 책의 만듦새가 너무 예뻐서!! 사서 읽었다.

“네가 좋아. 미도리, 봄날의 곰만큼.” 그리고 “삶은 비스킷 통이야.”와 “딸기 쇼트케이크”같은 유명한 대사의 출처가 다 노르웨이의 숲이었던 것.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왜 한국에서 “상실의 시대”로 제목이 번역되었는지 알 것 같더라.(신의 한수라고 생각 한다)
20대의 무렵 상실을 경험하고 난 뒤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것 자체를 잘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 제대로 슬퍼할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잘 처리하지 못한 상실의 감정은 어느 날이고 문득문득 발목을 잡는다..

소설은 알려준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는 것. 슬픔을 다 슬퍼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 견딜 수 없다면 때론 누군가와 함께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 잘 이별하기 위해 잠정적으로라도 슬픔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p.529)” 

소설 속 나와 레이코씨가 나오코를 애도하기 위해 그들만의 장례식을 하는 부분에서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제대로 슬퍼할 줄 아는 사람들도 있구나. 지금까지 보아온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많은 장면들 중에 베스트는 노르웨이숲의 장례식으로 꼽게 될 듯.

레이코가 연주한 쉰곡의 기타연주곡으로 예상되는 음원을 모아둔 플레이리스트를 찾아서 들으며 생각했다.


나도 나오코 처럼 살아있을 때 꼭 좋아하는 노래 하나쯤은 선정해 둬야겠다고. 훗날 나를 잃은 내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건 어디서건 그 노래를 함께 부르거나 연주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