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책

출간일 2000년 12월 2일

스물여덟에 데미안을 처음으로 읽었다. 왜 이걸 이제야 읽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반이었고, 어쩌면 지금 이 시기에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다-라고 느낀 안도감이 반이었다. ‘데미안’에 등장하는 싱클레어라는 인물을 통해 나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제3자가 되어 나의 모습을 다시금 바라보게 되었다. 그 느낌은 참 기이하였다. 나의 이름으로 스물여덟 해를 살아오면서, 내가 한 번도 닿아 보지 못한 내 안의 낯선 섬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어쨌든 이 책으로 인해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번민과 고뇌들의 근원지가 또렷해졌음을 절감하였다. 흔들리는 경계선 사이에 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싱클레어는 자신이 겪고 있는 불안의 시간이 마치 제 삶의 전체인양 절망한다. 지금의 불안감과 무기력감이 마치 내 처음과 끝까지의 삶인 양 매일을 불안에 떨면서 말이다. 그러한 삶은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때워가고 있는 것이었다. 정확한 정답의 숫자가 나오지 않는 이해들을 고장 난 계산기로 타산해가며, 정답도 아닌 것을 정답이라고 자위한 채 살아온 삶이었다. 그런 내가 데미안을 만났다. 꿈에서 우리는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물 위를 걷는다. 그게 왜 꿈(비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내 현실이 정답이라 치부하며, 꿈꾸는 모든 것들은 오답이라 분류했던 나의 오만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아.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머저리의 삶을 살아온 것이었다. 대체 왜. 그래야만 했을까. 데미안, 당신은 누구길래 그렇게 강인하느냐 묻고 싶어졌다. 나는 왜 데미안이 아닌 싱클레어일까, 한 편으로는 그에게 시기심마저 들었다. 그런 내게, 데미안은 말한다.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이 때문에 불안한 거야’라고. 그래, 맞다. 데미안은 바로 자신을 알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은 것이고, 나는 아직 나의 자아를 의심과 의심으로 더듬어가는 단계이기에 불안한 것이었다. 혹, 나는 찾았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나는 바로 그것을 안다. 하지만 항상 뒤로, 조금 더 늦게, 후에, 그렇게 차일피일 미뤄온 삶을 살아왔다. 단지, 내 안에서 꿈틀대는 그것. 그것만을 살려고 했는데,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그래, 이 질문에 답을 해보자. 나는 싱클레어처럼 내 자신에 대해 언제나 열중해있었다. 온통 내 세상이 나 하나였으므로, 나에게 귀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이 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옆에 있는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들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진정한 내가 아닌, 거짓된 형체 쯤으로 여겼을런지도 모를일이다. 그리하여, 가면을 썼다. 어설픈 가면을 쓰고 시덥잖은 농담에 억지 웃음을 짓고, 같잖은 투정들에 동조나 해가며 거짓 현실을 자위하며 살아온 삶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어떤 이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더라. 그렇게 살지 말라고. 그이는 순전히 내가 자신에게 준 고통만으로 그렇게 이야기 했을 뿐이었지만 나는 굉장한 상처를 받았다. 나는 그이에게 아픔을 주려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위했으면 위했지. 그 때문에 사나흘 밤낮을 앓았다. 분함이었을까, 서운함이었을까. 내 열병의 연유를 고민하였지만 명쾌하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데미안을 읽음으로써 알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기만했기 때문에 아팠던 것이었다.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사람에게로부터 경멸의 눈빛을 쏘아 받으며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던 것이었다. 그 사람을 보기가 힘들어, 한동안 피해 다녔다. 그는 어쩌면 나의 데미안이었을런지도.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가 지적이고, 통찰력이 높은 사내의 모습이 아닌 것에 실망스럽고, 억울하고, 답답해서 나는 나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화가 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참으로 영악하다. 이제 알겠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내가 맞닿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타인들이 나의 데미안이었음을. 그들의 허점과 과오에 내가 열분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투정만 하는 모습에 내가 무기력해지는 모습도 그들이 알에서 나오지 못하는 그 허약함에. 나 자신을 투영하여 의기소침해질 뿐이었다는 것을.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나는 나를 찾았다. 이제 세계를 깨뜨리는 일만이 남은 것이다. 그러니 항상 나는 나 자신의 편에 서야 할 것이다. 감사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