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고, [1Q84]는 2권 중반을 읽다가 읽지 않았다. 하루키를 읽다 말거나, 읽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재미가 없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하루키의 소설에 ‘베스트셀러’라는 말을 갖다 붙일 수 있을까. 그의 소설은 그 단어를 가져다 붙이기에는 너무 크다. 또한 나에게도 그의 존재는 컸다. 커다란 읽을거리지만 읽히지 않는 존재.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이겠다.

 

[노르웨의 숲]은 나의 마지막 시도였다. 무엇이든 삼세번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기에, 그의 신간 [기사단장 죽이기]도 읽지 않은 채 먼저 [노르웨의 숲]부터 집어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집에는 기사단장 죽이기 머그컵이 있다. 읽지 않은 책도 많은데, 읽지 않은 책의 머그컵쯤이야.) 결론부터 말하면 성공적이었다. 눈 돌아가게 마음에 드는 책 표지를 빼고 생각하더라도 [노르웨이의 숲]을 소장할 이유가 있었다.

 

[노르웨이의 숲]은 1987년 그가 발표한 책으로서 최근작에 속한다. 37세에 이 소설을 발표하였는데, 소설에서 19살의 와타나베가 등장하는 1968은 하루키가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에 입학한 년도와 일치한다.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는 첫 문장은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에 앉아 있었다.”이다. ‘그때’라는 말이 시간의 혼란을 가져다주기는 한지만, [노르웨이의 숲]이 하루키의 자전적 성격을 띈다는 말을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자전적이란 말은 소설 속 일들이 그가 겪은 일이거나 혹은 정반대라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가 겪지 않은 일을 누구보다 강렬하게 기억하니까.) 또한 이 책은 원래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의역되어 출간되었는데,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에 이 작품을 포함시키면서 원제를 살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으로 재출간하였다. 그러니 어디 가서 [상실의 시대]는 읽어보았는데 [노르웨이의 숲]은 아직 안 읽어보았어요 하지는 말기를.

 

 

이전에 읽은 책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도 대학에 다니는 남성이 주인공이다. 기차에 관련된 모든 것에 빠져있는 쓰쿠루는, 아무것에도 빠지지 않은 채  끝없이 책과 영화를 보는 와타나베와 똑같아 보인다. 그러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름이 너무 길어 줄여 읽어야 하나 계속 고민이다. 색다순해 같은 식으로 줄여읽을 수도 없고 참)는 [노르웨의 숲]에 견줄 수가 없다. 작가와 이 저작의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류작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노르웨이의 숲]의 줄거리는 정리하지 않겠다만 잔뜩 스포를 흩뿌린다면. 기즈키가 있다가 죽었고, 나오코가 있었고 그와 한 번만 잔 후 죽었고, 레이코가 있고 그와 잤고, 미도리가 있고 그와 자지 않았다. 나에게는 갑자기 레이코와 자는 장면이 꽤 충격적이었는데, 레이코가 “저기, 와타나베, 나랑 그거 해.”라고 한 말하자 곧바로 “신기하네요. 나도 같은 생각을 해거든요.”라고 말하는 와타나베의 대사에 당황해서였다. 레이코와 와타나베의 행위를 통해 나오코를 기린다거나 그런다거나 하는 식의 해석은 필요없고 말이다.

 

어쨌거나 내가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건, 책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큰 일이 아닌 것처럼 무시히 자신을 견뎌내는 와타나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분위기가 이 책의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둥둥 떠다닌다. 이 분위기는 책에 나를 홀리게 만드는데, 이 책이 나의 열아홉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열아홉 대학 1학년 시절, 어두운 골방에 드러앉아 이러다가 미쳐버릴 수 있겠구나 자주 생각하곤 했다. 내 주변에 둥둥 떠다니는 죽음은 없었지만, 내 인생에서 문장을 가장 많이 만들어낸 시기였다. 지금처럼 없는 문장을 뱉어내고 문장의 배설에 후회하는 시간이 아니라, 고요 속에 흘러넘친 사유를 어쩔 수 없이 토해내던 시기였다.

 

나는 서른 일곱이 되어 나의 열아홉을 떠올리고 무슨 생각을 할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스무살을 앞에 두고 마음껏 실수를 내뱉던 시간은 지났다. 나는 실수하지 않아야 하는 직장인이 되었고, 사유의 골 안에 틀어박히기에는 너무 바쁘다. 이것이 내가 영원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오코처럼 입을 틀어막아버린다. 말하고 후회하고, 쓰고 후회한다. 생각보다 성급한 글들은 늘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나는 읽으면 읽을수록 말을 잃어간다.

 

해가 갈수록 언어를 잃어가는 나에게, 이 책 뒷표지에 나오는 한 문장을 들려주고 싶다. “나를 언제까지나 잊지 마.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