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 남아 있는 나날

“이제 와서 뭘 숨기겠는가?” 팟캐스트 낭만서점에서 [남아 있는 나날]편을 방송할 때 부제로 삼았던 문장이다. 이 문장만큼 [남아 있는 나날]을 한번에 표현하는 문장이 있을까.

 
이야기는 주인공인 스티븐스가 옛 동료인 켄턴 양을 만나기 위해 자동차 여행을 떠나며 여러 가지 기억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주인공인 스티븐스는 영국에서 집사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유능한 집사란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품위’를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집사로서의 전문가적 실존은 주인을 불편 없이 잘 모시는 것이며 이때 하나의 주체로서의 정체성과 욕망은 거세되어야 할 것이 된다.

 
소설 [남아 있는 나날] 내용의 대부분은 주인공 스티븐스의 독백이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늘어놓는 그의 말의 반은 자부심이고 반은 변명이다. 그의 독백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비겁한 그의 말투에 거리감을 두게 된다. 위대한 집사로서 그가 모셨던 주인 달링턴 경은 실제론 불완전한 인물이었고, 달링턴 경을 향한 비판 없는 충성심은 그가 집사로서 평생을 버텨 온 자부심이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집사로 산다는 것은 무슨 판토마임을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슬쩍 밀거나 약간만 비틀거리게 만들어도 가면이 떨어져 내려가면 뒤의 배우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는 점에서 말이다. 위대한 집사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 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이다. (58)

 
어떠한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찢어발겨지지 않는 집사의 삶이란 다음과 같다. 같은 집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집사로서의 모든 일을 끝마치고 나서 그를 기리러 올라가는 것, 아버지를 진찰하러 때늦게 온 의사를 발가락이 아프다는 저택 손님에게 프로페셔널한 척 데려다주는 것. 독일의 지지자인 달린텅 경이 저택 내 유대인 직원 둘을 해고하라 말했을 때, 어떠한 동요도 없이 그들을 내쫓는 것, 사랑하는 여인에게 모질게 대하고 그녀가 떠난다고 말하는 와중에도 전문가로서의 실존만을 붙잡고 있는 것.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되었을 때에서야 마음속 영원한 켄턴 양에게 잠시나마 사적인 실존을 내보일 수 있을 뿐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켄턴 양’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진작에 해명했어야 했다. 사실 ‘켄턴 양’의 정확한 호칭은 ‘벤 부인’이며 벌써 20년째 그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내가 달링턴 홀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알고 지냈던 그녀는 처녀 시절의 그녀일 뿐, ‘벤 부인’이 되기 위해 서부 지방으로 떠난 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예전처럼, 그리고 오랜 세월 한결같이 내 마음에서 불러온 대로 부르는 나를 너그럽게 봐주기를 바란다. (62)
이제 와서 뭘 숨기겠는가? 실제로 그 순간,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294)
“당신은 어떤가요, 스티븐스 씨? 달링턴 홀로 돌아가면 당신에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글쎄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허함은 아닐 겁니다, 벤 부인. 그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럴 리가 없지요. 일 다음의 일, 그리고 또 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요.”(290)

 
이 소설이 애절한 사랑을 노래한 연애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늦게나마 자신의 마음을 타인 앞에서 솔직하게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스티븐스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