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일 2009년 6월 30일

[면도날]은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에서]와 함께 서머싯 몸의 3대 장편소설로 불리우는 작품이다. 나는 아직 그 유명한 [달과 6펜스]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독서모임 때문에 면도날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내가 이따금 만나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한 남자를 회상한 내용이다.(10) 이 이야기는 작가 서머싯 몸이 알고 지낸 래리라는 남자와 여러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과 사실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명확한 기승전결과 결말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다만 우리의 인생이 때로는 희곡보다 더 희극같고, 소설보다 더 소설같음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읽기 전부터 이 책에 매력을 느낄 것임이 틀림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소설에 확 빠져버렸다. 올해 내가 읽은 책 중에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면도날을 타는 것처럼 힘겹게 삶을 밀어내는 인물들의 삶이 마치 내 삶처럼 느껴져 가만히 쓰다듬고 싶어졌다. 이 소설은 비극의 성공담이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내 의도와는 달리, 이 글이 일종의 성공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 같은 평범한 대중은 모두 성공담을 좋아한다. 그러니 나의 결말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516) 위와 같은 문장으로 끝나는 이 소설에는 전쟁 때 눈 앞에서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동료의 죽음을 본 뒤 세상을 떠돌게 된 래리, 사교계의 중심에 서는 것이 일생의 목표였지만 초라하게 막을 내린 엘리엇, 래리와 스스로 중 누구를 더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이사벨, 이사벨을 사랑하는 우둔한 남자 그레이, 기민한 감수성을 지녔으나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에 자신의 감정을 모조리 쏟아내버려 완전히 망가진 삶을 살게 된 소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황량한 세상에 자신의 삶을 던지며 사는 수잔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지만, 인생을 최대한 쓸모있게 살기(350) 위해 치열하게 달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그 어떤 소설보다 몰입하여 읽었다. 모든 등장인물들을 공감하고 사랑했다. 이것이 이 책의 힘인지 어젯밤 책을 읽던 순간의 나의 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을 만난 것은 나의 운명이었음이 틀림없다. <밑줄긋기> _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그를 사랑하는걸요” (70) _ 그걸 내가 어찌 알겠어. 때로 인간은 아주 작은 무언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눈앞의 사건과는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이나 기분이 흐르기도 하지. (중략) 난 언젠가 만성절에 거행된 미사에 참석한 적이 있어. 프랑스에선 만성절을 ‘망자의 날’이라고도 부르지. 프랑스 어떤 작은 마을의 성당이었는데, 과거에 독일군이 프랑스에 진군해 들어왔을 떄 피해를 입은 마을이었어. 미사에 군인들과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많이 와 있었어. 묘지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십자가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엄숙하고 슬픈 분위기 속에서 미사하가 진행되는 동안 여자들도 남자들도 눈물을 흘렸지. 그런데 난 말이지, 그때 이상하게도 그 작은 십자가들 아래 누워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우리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89) _ “아냐, 당신을 사랑해. 때로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면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게 되나 봐.” (127) _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저, 래리랑 약혼 취소하기로 했어요.” 브래들리 부인이 이사벨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약간의 걱정이 묻어 있었다. “엄마를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 아니니, 이사벨?” 이사벨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적으로 저 자신을 위해 그런 거에요.” (135) _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서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그들은 어떻게든 그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 (148) _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세요? 전 제가 주인공 역할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주인공은 래리니까요. 그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아름다운 꿈을 꾸는 몽상가죠. 설령 꿈이 실현되지 못한다 해도 그런 훌륭한 꿈을 꾸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멋진 일일 거예요. 반면에 저는 냉정하고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역할을 하고 있죠. 하지만 선생님이 잊고 계신 점이 있어요. 결국 손해보는 사람은 저라는 사실 말이에요. (152) _ “10년 전에 래리와 결혼하지 않은 걸 후회하나?” “아뇨.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을 거에요. 하지만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래리와 도망이라도 갔겠쬬. 한3개월쯤 살다가 그를 제 인생에서 영원히 내쳤겠지만.” (275) _ 그래서 하고 싶을 때마다 그냥 그 사람 방에 가서 침대에 누웠어요. 그는 늘 아주 다정하게 맞아 줬죠. 그러니까 자연적인 본능은 어느 정도 있었던 거예요. 마라하자면, 다른 데 몰두해서 밥 먹는 것도 잊고 있다가 상을 잘 차려 놓으면 맛있게 먹는, 그런 남자였던 거죠. (307) _ 이사벨에게, 너는 남편과 아이들을 충실하게 사랑하긴 하지만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328) _ “인생을 최대한 쓸모 있는 사는 법, 그것보다 더 실용적인 게 있을까?” (350) _ 돈은 나한테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줬거든. 그건 바로 자유지. 돈이 있으면 못마땅하게 구는 사람한테 언제는 꺼져 버리라고 말할 수 있잖아. 그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자넨 모를 거야.” (4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