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안 숲, 노르웨이의 숲

기억이라는 건 왠지 이상한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 초원 속에 있었을 때, 나는 그런 풍경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특별히 인상적인 풍경이라 할 것도 없었고, 십 팔년이 지나고도 그 풍경을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로선 풍경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생각했고, 그때 내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아름다운 한 여자를 생각했고, 나와 그녀를 생각했고 그리고 다시 나 자신을 생각했다. 그때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의 손으로 되돌아오는 나이였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사랑을 하고 있었고 그 사랑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장소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주변 풍경에 신경을 쓸 여유 같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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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를 읽기 시작하고 한 장 넘기면 나오는 작가의 회상이다. 20살의 어리지만 성인의 경계에 있는 사랑에 대해 간결하고 정확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어린 사랑을 할 때 나와 상대에 집중을 하고 주변의 상황을 신경쓰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30줄에 들어서서 바라볼 때 비로소 이러한 사랑의 감정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사회에 적응하고, 누군가의 존재 가치를 판단하고, 속세에 찌들고, 삶을 연장해 나갈 시기엔 상대와 나의 사랑에 관하여가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주인공 와타나베의 생각으로 시작 되는 소설은 저 문장으로 모두 요약된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보편적인 끝이 있는 사랑의 경우 모두 적용 될 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사랑이야기에는 주인공 (와타나베)와 나오코 둘만의 사랑을 담지는 않았다. 주변인 중 하나인 나가사와 선배와 하쓰미의 사랑에 관하여도 주인공 시점에서 서술된다. 일반적인 사랑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이들의 사랑을 왜곡하지 않고 보이는데로 주인공은 서술한다. 책을 좋아하고, 여자와 향락을, 자유로운 성을 강조하는 나가사와 선배의 모습은 약간은 억압되어있는 듯한 와타나베와 반대로 비추어 진다. 반면 순애보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하쓰미는 와타나베와 잘 연결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나가사와는 언제나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갈구하며 이를 자신의 여자친구인 하쓰미에게 숨기지 않는다. 하쓰미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런 그를 떠나가지 못하고 기다리다, 나가사와가 유학을 간 사이 자살을 하며 그 사랑을 마치게 된다.

주인공이 보여주는 비교적 플라토닉 (작가가 성에 관해 관대하다.) 사랑은 나가사와 선배의 사랑과 많은 부분에서 대조된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여러 가지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단순 쾌락을 위한 만남들, 인스턴트식 사랑에 관해서 말이다. 이 소설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확히 ‘이런 사랑의 최후는 파멸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하쓰미라는 단편적인 캐릭터의 특성이 그녀를 자살이라는 최후로 이끈 것 같다. 과연 사랑에는 선과 악이 존재 할까? 과연 사랑에 순수함과 더러움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가치는 저마다의 판단 기준에 달려있다. 이는 제도적으로 억압 받지 않고 (결혼하지 않은 상태)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글의 도입에서 말했듯이, 20대 초반의 사랑은 순수하고 고결하고 30대 이후의 사랑은 정치적이고 세속적이며 계산적이여서 순수함과 멀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순수함과 더러움이라는 가치가 사랑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주인공 와타나베는 순애보적인 사랑을 하지만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는 미도리도 있고, 나가사와 선배와 나간 술자리에서 만난 수많은 여자들, 미도리와 같은 요양원에 있던 레이코라는 여자까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순애보적인 사랑은 한 사람과의 정신적, 신체적 결합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와타나베의 순애보적 사랑은 한 사람과의 정신적, 신체적 결합이 주 이지만, 그를 초월하는 면이 있다. 사실 나도 전자 같은 사랑을 진정한 순애보적 사랑이라 생각하기에 이에 관해 와타나베를 이해하기도, 이 곳에 풀어쓰기조차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보고 경험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사랑을 듬뿍 받아보고 싶어. 이젠 됐어요, 배가 터질 것 같아요, 잘 먹었습니다. 라고 할 정도로”

(중략)

“완벽한 사랑을?” (와타나베)

“아니, 아무리 내가 욕심쟁이라지만 거기까지 바라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완벽하게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가령 지금 내가 자기에게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말이야, 그러면 자기는 모든 걸 집어치우고 그걸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헐레벌떡 돌아와서 ‘자, 미도리. 딸기 쇼트케이크야.’ 하고 내밀겠지. 그러면 나는 ‘흥, 이런 건 이젠 먹고 시피 않아.’ 그러면서 그걸 창밖으로 휙 내던지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그런거란 말이야.”

(중략)

” 하지만 난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하고 미도리는 내 어때 위에서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건 아주 사소한 혹은 시시한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거기부터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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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와 와타나베의 대화이다. 미도리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는 대화라고 생각된다. 미도리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작중 현재 아버지가 뇌 종양 수술로 삶을 마감해 가는 시점이다. 부모의 사랑을 깊게 받아보지 못한 미도리는 연애 상대에게 그 사랑을 바라고 있다. 딸기 쇼트케이크는 단순 깊은 사랑에 대한 갈망의 서술적인 설명일 뿐이다. 실제 작중 성격이 비슷하다고 느껴지긴 하나 저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

마지막 대화에서 나는 깊은 감명을 얻었다. 요즘 들어 사랑의 시작은 무엇일까라는 본질적 질문이 내 가슴속에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생물학적 사랑의 시작에 대해서는 이미 호르몬의 장난질이라는 건조하고 시시한 정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혹은 우리가 궁금해하는 사랑의 시작은 무엇일까. 길거리를 거닐다 보면 외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시선을 빼앗거나, 더 나아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낄 수 있다. 혹자는 인연을 만들어 보고자 대화를 시도하고, 누군가는 목에 댐을 설치하여 근질거림을 참고 넘어간다.

그렇다면 외적인 조건에 의해 사랑이 시작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속물적이고 외모지상주의자 같아 보인다. 물론 생명의 시작은 외적 조건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진화의 산물인 인간의 경우 단순히 한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없다.

미도리는 사소하고 시시한 부분에서 사랑이 시작 된다고 하였다. 사소한 부분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외적으로 사소한 부분. 이를테면 짧은 손톱이라던가, 집중하는 모습 등 눈에 보이는 사소한 형태들이다. 이런 것은 결국 이전에 말한 외적인 조건에 의해 사랑이 시작되는 바와 크게 다를게 없다. 두 번째로는 내적으로 느껴지는 사소한 부분들이다. 동물을 아껴주는 마음, 부모에게 하는 행동들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들이다.

이 책에는 사랑에 대해 많은 주제를 던지지만 사랑의 시작에 관해서는 이 한 부분 외에는 나오지 않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하는 사랑은 누군가의 내적인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같은 공간에 있던 타인의 어떠한 작은 행동이, 그걸 보고 있는 나의 마음 속에 작은 동요를 일으키고, 그 동요가 파도가 되어 밀려오는 일련의 과정. 그것을사랑의 시작부터 절정까지라고 하루키는 정의 내린다.

“가끔 저렇게 되거든. 흥분하고, 울고. 그래도 차라리 저런 상태는 나은 거야. 감정을 드러내 보이니까. 무서운 건 드러나지 않을 때거든. 그렇게 되면 감정이 몸속에 쌓이고 점점 굳어가는 거야. 온갖 감정이 뭉쳐 몸속에서 죽어가지. 그 지경이 되면 큰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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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와 요양원 생활을 같이 하는 레이코가 와타나베를 진정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다. 이 책에서는 정신적 아픔이 있는 나오코의 병에 대해 설명한다.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해 보인다고 서술한다. 이는 나오코에 우리를 투영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들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나만 빼고 다들 이상한 것 같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우리도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이다. 책의 뉘앙스에서도 나오코가 그런 형태의 생각 때문에 병들어가는 것이 아닌 다른 이유에 의해 병들어가는 것으로 나온다. (죽은 기즈키와 언니의 망령? 때문) 그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어떠한 행동을 할까? 저마다의 방법으로 상대에게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결하고 피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 방편 중에 하나로 나온 것이 레이코의 말이다. 울고 불고 난리를 치고 나면 한결 마음이 말끔해진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솔직하다는 이야기이다. 나를 속이지 않고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행동이다.

작중 레이코는 레즈비언에게 당한 이야기를 하며 요양원에 들어온 이야기를 주인공에게 알려준다. 이 책에서는 확실히 다양한 사랑이 표현된 것 같다.

레이코는 피아니스트였으며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정신병을 얻게 되었다. 피아노를 포기하며 치료에 여념이 없던 그녀는 어느정도 치유가 된 후 일반적인 삶을 영위한다. 결혼을 하며 아이도 낳는다. 그러던중 동네에 있던 한 여자아이에게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게 된다. 그 여자아이는 눈에 띄게 예쁜 아이였고, 모든 것이 계산된 영악한 아이였다. 그녀에게 레슨을 시작한지 수 달째, 그 여자아이는 레즈비언이었고, 레이코를 노려 범하게 된다. 어린 아이의 손에 놀아난 레이코는 무언가를 감춘다는 마음의 부담으로 병이 재발하고, 사회에서는 치유할 수 없게 되자 요양원으로 들어온다는 이야기이다.

무엇인가 사실을 감춘다는 마음의 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녀는 이러한 경험에 의해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표현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주인공에게 위와 같은 조언을 던져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비밀과 정면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과 마주칠 수도 있고 타인이 나에게 고백해온, 혹은 발견한 비밀이 있을 수도 있다. 비밀이라는 것은 생기면 생길수록, 가지면 가질수록 배가 되어 무겁게 느껴진다. 마음의 무거움을 입의 가벼움이 따라가지 못해 누설되는 비밀도 많다. 이는 마음의 짐을 순간 가볍게 해주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할 수도 있다. 비밀을 표현하는 것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 두 가지를 잘 구분하여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정상이라는 점은,” 하고 레이코 씨가 말했다.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지.“

-218page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처럼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또랑또랑한 귀여운 아기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디 놀이 안 할래요?’ 하고, 그래서 너와 아기 곰은 서로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어때, 멋지지?“

-331page

미도리의 질문에 대한 와타나베의 대답이다. 사랑 표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누군가가 사랑에 대해 물어볼 때 나는 이렇게 대답 할 수 있을까? 포근하고 따듯하다고

“비스킷 통에 여러 가지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데,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만 자꾸 먹어버리면, 나중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357page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음이 정리된 미도리의 인생철학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미도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온갖 일을 겪으며 고통에 익숙해졌다. 그를 비스킷 통에 비유하며 앞날을 그리고 있다.

나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많이 한다. 우리의 삶의 행복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물론 수치적으로 정확히 계산되는 값이 아니다. 행복이 연속되면 적응해버려서 행복인 줄 모르는 것처럼 정도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없다면 얼마나 슬픈 삶이겠는가? 물론 작은 행복들을 미루고 미루다 썩어버린 비스킷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지만.

“죽은은 삶의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387page

와타나베의 독백이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와타나베의 생각으로서, 어렸을 적 친구인 기즈키의 죽음으로 배운 삶의 철학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떠한 낭떠러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적 죽음에 의해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현생에서의 삶이 깨끗하지 못하면 내세에서의 안정적 삶을 보장 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죽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니체는 삶을 영속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죽음은 그저 다시 시작되기 위한 리셋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 전반에 도처하는 죽음도 이와 비슷하다. 누군가는 언젠가 죽고 그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오래도록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죽음을 슬프게 생각한다는 것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책은 돌려 설명하고 있다. 죽음은 삶 속에 내재되어 있어 떠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설명한다. 주인공은 나오코가 죽은 뒤 방황을 시작하지만 한 달 정도 뒤 정상적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미도리와 다시 사랑에 시작하는 듯한 뉘앙스로 소설은 결말을 맺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내 사랑과 삶의 끝으로 생각하는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슬픔도 한시적이지만 삶도 지속적이다. 비스킷 통 속 슬픔은 일순간 사라져 버린다. 슬픔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받아드리며 살아야 한다. 이 소설을 크게 관통하는 개념을 이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