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이반 투르게네프

소설을 읽는 목적은 무엇일까? 더 나아가 책을 읽는 목적은 무엇일까? 책 속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이것이다.

책 속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 저마다의 사연들을 가지고 있고 그 사연들은 무게감이 서로 다르다. 문학이 아닌 장르에서는 나의 과거와 미래가 담겨있다. 그것이 비록 내가 속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생물학적 시간상 속하지 않을 지라도 말이다. 상상으로 나는 그곳에 속할 수 있다. 나는 책 속에 있으며 시간을 넘나들며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를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할 수 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첫사랑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을 보여주는 세 가지의 소설이 실려 있다. 책의 제목이자 대표소설인 첫사랑에는 청년기에 맞이하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사랑은 언제나 비극적이라는 말을 익히 알고들 있을 것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누구보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주인공 남자아이(러시아 소설이 그러하듯 이름이 어렵다. 기억에 남지도 않으며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생략한다.)는 이웃으로 이사 온 여성을 사랑한다. 여자는 지역의 수많은 남자들을 부리며 살 수 있을 정도의 미인이다. 이 무리에서 주인공은 여자에게 간택되기 위하여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사랑은 따로 있었다. 그녀의 사랑은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이다. 이를 안 남자주인공은 사랑의 열병에서 벗어나게 된다.

소설의 큰 줄기는 이처럼 단순명료하다. 최근 유행하는 복잡한 플롯 형태의 소설에 비하면 원초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소설이 명작의 대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탁월한 감정 묘사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 마치 마법에 걸린 듯이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내가 느낀 것은 실로 새롭고 감미로운 것이었다.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을 뿐 꼼짝도 않고 앉아서 천천히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의 일을 생각하고 이따금 소리 없이 웃기도 하고, 때로는 ‘나는 사랑에 빠졌나 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속이 오싹해졌다.

44page

어린 시절 사랑의 감정을 처음으로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감정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데 가슴 속에선 꽝 하고 천둥이 치고, 머릿속에선 상대방의 이름이 끝없이 메아리치는 기분을 말이다. 작가는 사랑에 젖어듦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의 격한 감동을 짧은 문장으로 강하게 표현한다. 그 문장을 읽고 감상에 빠져들 무렵 내 첫사랑을 곱씹어 보게 된다. 소설 속 내가 밖의 나와 동일 시 되는 순간이다.

온실 속은 향기는 좋지만 그렇다고 그 속에서 살 수는 없단 말이야.

63page

여자주인공의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남자주인공에게 충고를 하며 하는 이야기이다. 겉모습에 속지 말고 진실을 바라보라는 말로 해석 할 수도 있고, 달콤한 유혹에 속아 어린나이에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충고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책 속 남자의 무리들이 하는 말이라면 이 말의 뜻은 ‘내가 차지하고 싶으니 너는 그만 떠나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대가 지닌 매력의 모든 비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능성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대의 힘을 다른 무엇을 위해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바람에 흩날려 보내는, 바로 그런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120page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서로 사랑하는 상호작용이 있고, 혼자 사랑하는 일방적인 사랑이 있다. 첫사랑은 대개 일방적인 사랑으로 기억하곤 한다. 그 이유는 처음이라는 상황이 주는 미완적인 느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사랑은 순전히 내 안에서 크고 자란다. 많은 것을 바라지만, 사랑을 잘 하지 못하기에 대부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첫사랑이 그렇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능성에 의해 미숙한 사랑은 시작되고, 그 감정은 아스라이 흩어지게 된다.

첫사랑은 폭풍처럼 다가와 안개처럼 사라진다. 일순간 나를 덮치지만 고요한 습기를 남기고 스리슬쩍 사라진다. 첫사랑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일부가 가슴 속에 크게 와 닿을 것이다.

성숙한 나이의 사랑은 완성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아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고 이반 투르게네프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다.

두 번째 소설인 귀족의 보금자리는 중년의 나이인 남자주인공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이미 혼인을 하였지만 부인의 외도로 인하여 부인을 떠나게 된다. 그러던 중 여자주인공을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둘은 서로 사랑하지만 이어지지 않는다. 전 부인이 다시 나타나 둘 사이를 훼방 놓기 때문이다. 종교적이고 순결한 여자주인공은 이에 순교적인 삶을 선택하여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며 소설은 마무리가 된다.

그는 밤새 그 눈길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소년 같은 사랑을 하고 있지는 않았고, 한숨을 쉬고 괴로워하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리자도 그런 종류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나이의 사랑에도 그 나름의 괴로움은 있는 법이다. 그도 그런 괴로움을 한껏 맛보고 있었다.

294page

나도 어느덧 30이 되었다. 그럼에도 사랑은 언제나 설레고 가슴 벅찬 일이다. 첫사랑의 감정처럼 가슴 속에 꽝하는 천둥은 없지만 잔잔한 파도가 일렁인다. 잔잔한 파도가 우숩게 보여도 그 위에 가만히 있다 보면 속이 뒤집어 진다. 강렬한 맛은 없지만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사랑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완숙한 사랑이 느릿느릿 시작되었다 해도 헤어나오는 것마저 미지근하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깊이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같다. 소설 속 주인공도 이로 인해 괴로움을 얻게 된다. 종교적인 삶을 사는 여자주인공은 부인이 살아있는 남자주인공을 사랑하는 데에 있어 부담감을 느끼고 죄를 씻기 위해 수녀원으로 들어가고 만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수많은 부담감을 이겨내야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생에는 그러한 순간이, 그러한 감정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냥 언급하기만 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

396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