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자, 나가서 좀 걸을까요. 지금 날씨가 무척 좋네요.” 그가 말했다.

 

로제는 토요일에 출발해 시골에서 주말을 보내자고 했었다. 그녀는 그 전까지 일을 다 끝낼 수 있을까? 로제가 아직도 그러고 싶어 할까? 혹시 그 말은, 그녀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는 순간, 그들의 사랑이 더 이상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중요하고 명백하게 여겨지는 순간, 사랑이, 그리고 밤이 그에게서 끌어낸 충동적인 약속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로제가 그녀의 집을 나서는 순간, 보도 위에서 그 자신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존재라는 강한 자유의 냄새를 맡는 순간, 그녀는 또다시 그를 잃고 말리라.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 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걸 문제 삼고 있는 게 아냐. 오히려 당신이 그것을 문제 삼지 않게 하려는 거야. 당신은 당연히 내게 그런 일을 감추고 싶겠지. 하지만 내게 그런 걸 감출 필요가 없어. 나는 어린애가 아냐, 폴. 내게는 당신을 이해할 능력도, 당신을 도울 능력도 있어. 알다시피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어서 무척 행복해.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 이상이야. 난 당신도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금 당신은 행복해지기에는 지나치게 로제에게 집착하고 있어. 당신은 우리의 사랑을 우연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해.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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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붙은 온점 세 개와 작가의 이름에 이끌려 읽게 되었다. 예상외로 정말 얇은 책이어서 하루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결말이 너무 마음에 안 들었다. 다시 로제에게 돌아간 폴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똥차’와 다시 만날 수 있지. 더군다나 로제가 개과천선한 것도 아니고 그 전과 변한 것 하나 없이 똑같다는 걸 암시하는 맨 마지막 문장을 보고 정말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다. 마치 남자친구와 싸운 친구의 연애 상담을 열심히 들어주며 헤어지라고 했지만 며칠 뒤 친구에게 우리 화해했어! 라는 연락을 받은 느낌. 이 책을 읽고 난 후 며칠동안은 도대체 폴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안 돼서 아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기도 했다. 결국 다시 책을 읽어본 결과 폴의 마음을 딱 눈곱 정도는 알 것 같기도 했다. 일단 시몽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도 했고 어쩌면 폴은 로제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안정감을 더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로제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감정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렇게 지냈기 때문에 익숙하고 편안한 거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시몽이었던 것 같다. 사랑과 안정감 중에 안정감을 선택했기 때문에 시몽과 헤어질 때 나는 늙었다며 자백하듯이 말한 건 아닐까? 어쩌면 내가 폴의 나이에 비슷해져서 다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그때는 폴의 마음을 다 느낄 수 있을까? 어찌 됐든, 로제는 유병장수 하고 사는 동안 적게 벌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