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 현실에 다리를 놓는 일이 성장인지도 …

” 어린 시절은 지금 보면 아득히 먼 옛날처럼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 이 모든 것이 ……” 그러면서 대령이 차 밖을 가리켜 보였다 . ”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지요 . 일본에 궁녀이면서 시인인 사람이 있었는데 , 오래전 어린 시절이 얼마나 슬픈가에 관한 시를 썼습니다 . 그녀는 어린 시절이 우리가 자랐던 이국의 땅과 같은 것이라고 썼지요 . ” ” 글쎄요 , 대령님 , 제게는 어린 시절이 낯선 이국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 많은 점에서 저는 지금까지 어린 시절 속에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지금에서야 막 어린 시절을 떠나는 여행을 시작했지요 . ” ( 본문 389 , 390 쪽 )

 

 

다섯번의 밑줄긋기가 모두 끝났다 . 생각잇기도 끝나고 독서후기만을 남겨놓은 채 , 며칠이 흘렀다 . 미리 해치울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 그러기엔 급격히 하강한 수은주만큼 거실의 기온도 몹시 낮아져 독서대를 마주한 채 몇자를 끄적이려고 하면 이내 손이 곱았다 . 우라지게도 춥고 손이 시려워서 다 귀찮았다 . 책을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 이불 속에선 책을 보지않는게 지독한 불면증 환자인 내가 세운 철칙였는데 , 그걸 무너뜨렸다 .
몇 권의 다른 책을 읽는 사이 , 과제는 부채감으로 꿈 속까지 스며들었다 . 계속 생각했었던 [우리가 고아였을 때]라는 제목의 의미가 계시처럼 꿈에 나타났었다 . 얼른 거실의 노트북 앞에 앉으니 꿈 속의 기억은 어느 새 폴폴 흩어져 단서조차 없다 . 허기가 급격하게 몰려온다 . 배가 고픈 허기인지 , 뭔가를 잃은 허기인지 그 조차 이젠 모르겠다 .
이 앞에 마지막 밑줄을 그었을 때까진 나는 역자의 후기를 읽지 않았다 . 요즘은 부러 피하게 된다 . 그들도 나름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만 이미 읽고 번역한 사람의 후기로 간섭을 받는게 너무 싫기 때문이다 . 그런데 가끔 예상 못한 복병처럼 내가 뻔한 말을 했구나 싶은 후기를 만난 적이 있고부턴 안 읽을 수도 없게 되버렸다 . 피하고 싶었는데 , 하나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갔구나 . 보기좋게 걸려들어서 … 젠장 . 열받아 . 그러니 애써 꿈의 기억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 어디서 찾는담 … 어쩌다 잠들면 늘 꿈을 꾸지만 그 꿈이 늘 같은 꿈이란 보장은 없다는게 문제고 , 언제 잠이 올지는 더욱 문제다 .
책 뒷편의 역자후기는 마치 어린 시절 표준전과나 , 동아전과에 실린 답지 같았다 . 갈수록 교육의 실태도 달리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판에 , 독서의 마무리까지 정답지를 마련하고 이렇게 읽어야 정답이야 하는 기준을 보여주는 듯 해서 , 몹시 몹시 불쾌했다 . 어쨌든 책의 내용을 내가 바꾸지는 못하니 , 읽은 감상 노선이라도 애써 바꿔얄 판이다 .
내가 어린 시절이고 보통의 가정에서 였다면 아마도 그 정답지면을 모두 절취해 줄 엄마가 계셨을텐데 ,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부모님이 계시질 않았고 , 내가 얻어보는 동네 언니 오빠들의 문제집은 늘 먼제 푼 흔적들이 얼마간 있다가 없다 했었다 . 그리고 뒷장의 정답지 역시 있다 없다 했었고 . 아버지는 문제지에 정답이 있건 없건 지워주실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내게 전적으로 맡기는 쪽이셨다 . 네 양심에 따라 ~ … 그 말이 더 무거워서 이미 푼 문제를 검산하는 느낌으로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 . 그것도 딱 아버지가 계셨던 시절까지만이다 . 기를 쓰고 잘하고 싶던 이유가 아버지였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
[우리가 고아였을 때] 를 말하라면 나는 잘 할 수 있을 거였다 . 나는 아직도 내가 고아라고 때때로 느끼고 있으며 , 그 사무치는 감정은 내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내 딸이 그런 감정을 때때로 느낄 세월 동안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안다 . 그 예감은 저마다의 지문과 같은 감정으로 특별히 어디에 쓰이는지는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무언가가 깨지거나 박살이 나는 순간에만 또렷해진다 . 상실이란 다른 이름으로 .
Som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
때때로 나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느끼네 ㅡ라는 노랫말이 계속 생각났다 . 이 책 어디에도 그런 비장하고 애처로운 장면은 연출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 아마 작가가 일본계 영국작가라는 이력을 보였을 때 , 그저 연상했었던 것 같다 . 그의 가족사나 개인적 상실들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한다 치더라도 두 나라를 ( 작가가 어느 한쪽이 강력히 자신의 모국이라 한다손 쳐도 ) 국적으로 보이는 부분에서 나 혼자 인간의 내적 갈등을 연상해버린 탓이 크리라 .
어쩌면 진부한 상상인지도 모르지만 , 줄곧 그 생각으로 이 책을 읽어나갔다 .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여 알려지고 난 후에 읽는 독자라면 더욱 .
때때로 엄연한 보호자가 있어도 우리는 그 존재를 완곡한 부정을 통해서만 다시금 재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곤 한다 . 이 제목은 그런 역설을 대표적으로 보이려는 노력이 아니었나 싶다 . 특히 소설 속 인물 크리스토퍼를 대신 내세워 작가 자신이 잃은 태생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 같은 그것 말이다 .
소설 속에서는 작가인지 분신인지 모를 인물들이 각국으로 흩어져 그 자신의 심리를 그때 그때 대신 표현한다고 보이곤 했다 . 그 모든 걸 의도한 장치로 쓴 것이라면 상당히 예민하고 섬세하기 짝이 없으며 그 상상력은 가히 소녀적이기도 하다 . 그래서 제목이 우리가 고아였을 때 ㅡ인가 생각한다 .
소설의 시대 배경은 동아시아 격변기에 맞춰져 있다 . 나는 감히 상상하는데 이 책은 작가가 프랜시스 버넷의 소공녀를 읽고 쓴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 단지 상상일 뿐이다 . 아니면 새라를 불러내기 위해 그 같은 무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고 … 우리 모두를 고아였던 때로 보내기 위한 무대 장치로 말이다 . 아니면 말고 , 그치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 상상을 풀어봐야겠지 .
소공녀 새라에서 부유한 아버지를 잃은 주인공은 나중에 아버지의 친구가 그녀를 되찾기까진 다락방에서 이따금 창을 통해 건너오는 원숭이와 친구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으로 힘든 시기를 이겨낸다 . 현실은 비록 남루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자신은 어느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공주라는 환상이 그녀의 밝음을 유지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곤 한다 .
[ 우리가 고아였을 때 ] 의 크리스토퍼나 새라의 경우는 원래의 부유함이 원동력이 아닌 상실이란 것에 힘을 얻고 , 꿈을 잃지 않는 것으로 급변하는 환경에 맞서는 인간의 유형이다 .
조금 돌고 돌아서 진실을 찾긴하지만 결국은 진실과 마주할 용기를 가진 주인공들 . 허황된 상상에 지나지 않을 지 몰라도 크리스토퍼와 아키라가 어릴 적 놀이로 대신한 불안의 요소처럼 . 나 역시 그들의 불운을 모험과 꿈에 대한 열정으로 바꿔보면서 소설 읽기를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