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번역서가 절판되어 본의 아니게 원서를 사서 보고, 어렵사리 번역본을 구해서 또 한번 읽은 책(Embracing Defeat, 패배를 껴안고)이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와닿지 않은 부분이 있어 어제는 기어이 일본어 번역서까지 주문해버렸다. 제목은 우리말 번역과 같은 “敗北を抱きしめて”이다. 이렇게 각기 다른 언어로 세번 읽는 책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이 책을 이해하려면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 근세사에 대한 선행 지식이 필요하며, 또한 기초 수준이라도 일본어를 알고 있어야 보기가 수월할 것이다. 물론 본인은 그런 배경 지식이 충분하지 못해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 했으며, 수시로 구글링해서 각종 영상과 이미지를 확인하여 최대한 그 시대로 들어가보려 했다. 스미다가와 강, 우에노 아메요코 시장, 히비야 공원, 유우라쿠초역 주변 판판(일본인 접대부)들, 긴자 가부키자, 칸다 서점가, 신바시역 주변 채소밭, 신주쿠 환락가 쇼쿠안도오리 등 개인적으로 도쿄에서 가 본 지역이 등장하는데 현재 모습과 사뭇 다르게 묘사된 시절을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었다.

역사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단순 사실만 나열한 책을 보면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러나 특정 시기에 대해 방대한 근거자료와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비판적인 해석과 적절한 비유로 쉽게 기술한 책은 어떠한 소설책보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 지적 만족감도 동시에 느끼게 되는데, 바로 이 책이 그러하다. 저자인 John W. Dower 교수는 퓰리처상 수상이 당연해 보일 정도로 일본어를 포함한 일본의 모든 것에 깊은 통찰을 보이고 있으며, 전미 도서상의 심사평에 있듯이 유려하고 깔끔한 문장을 보여주었다. 그 이상의 평가는 저자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 독자 입장에서는 예의가 아닌듯 하여 생략한다.

연합군 해체 과정에서 미국의 일본 독점, 적대적일줄 알았던 일본인들의 놀라운 환대, 패전에 따른 허탈감과 동시에 느껴지는 안도감, 신격화된 맥아더와 휘하 점령군의 전횡, 엉성한 전범 재판, 일왕에 대한 인식 변화, 아시아에서 만행을 저지른 가해자가 아니라 오로지 원폭 피해자라는 인식들, 애치슨 라인과 한국 전쟁, 종전후 5년만에 일본을 재무장시켜야 했던 워싱턴의 판단, 망해야할 기업이 자국 군비확장으로 기사회생하는 상황, 전후 일본의 문학/예술, 강자에 빌붙어 언제나 호의호식하는 정치가/기업가/관료/군간부들, 미국보다도 이상적으로 작성된 평화헌법의 탄생과정, 일본 공산당의 변화와 역할, 야쿠자의 생성 이유, 재일 조선인을 포함한 외국인의 입지, 맥아더 복귀 이후 일본인들의 미국인식 등등 미국인의 눈으로 설명된 당시 상황인지라 점령군의 시선에 동조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래도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다.

책 내용중 인상깊은 구절 하나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다.

<…While the media in the United States were chuckling and enthusing over the “Americanization” on Japan, the Japanese were quietly and skillfully Japanizing the Americans.
It was all part of the challenge of conquering the conqueror.

…미국 언론들이 일본의 ‘미국화’를 킬킬거리며 외쳐 대고 있을 때, 일본인들은 조용하고도 능숙하게 미국인들을 일본화시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정복자를 정복한다는 도전적 과업의 일환이었다.>

나는 정확히 30년전 고교시절, 군산 미공군기지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도 그대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부대 정문에는 ‘하늘의 수호신’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우리나라를 왜 남의 군대가 지키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던 터라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중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삐딱한 그 시각으로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를 바라본다.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서조차 몰이해에 가까웠던 그가 패전국 식민지에 불과했던 조선, 가여운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대해 무슨 역사인식이나 인도적 관념이 있었겠는가.

딱히 조화롭다고 할 수는 없는 현재 한미일 관계가 일본 패전 직후 혼란한 상황에서 어떻게 기원하였으며, 그 틀이 어떤 함수 관계에 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다면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 읽으면서 자잘한 오류들 20여 곳을 확인했는데, 혹시 민음사에서 개정판을 찍어낼 의향이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