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는 학업성적이 뛰어나지 못했다. 아니 낙제로 학교에서 이미 퇴학 처분을 받아 기성교육 제도내의 실패자로 낙인 찍힌 문제아였다. 하지만 그는 기성 세대가 주입하려고 하는 관습 및 고정관념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비꼬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지성과 교육으로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히 냉철하고 도전적인 관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가 궁극적으로 지켜려고 했던 것은 ‘순수성’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길에서 우연이 듣게 된 한 아이의 노래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의 역할을 자처, 절벽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그의 마음, 욕설이 써져있던 학교의 낙서를 지워 동생이 외설적인 것에 물들지 않게 하려는 노력, 또 어릴적 사귀었던 제인이 스트라드레이터에 의해 혹시 순결을 빼앗기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는 장면에서 여과없이 드러난다. 그가 고발하려고 했던 것은 기성 교육제도나 잘못된 사회구조이긴 했지만 그는 그것을 통째로 뒤집어 엎는 급진적인 인물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현실도피의 방편으로 서부로 떠나려 했던 그의 계획은 그가 애지중지 아꼈던 여동생 피비가 철없이 동행하려고 따라나서자 결국 만류하지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 홀든이 볼때 그가 퇴학당한 펜시 고등학교는 거짓과 속물주의를 대변한다. 아무도 학교에서 말꼬리를 본적도 없는데 잡지에 버젓이 낸 대중을 현혹시키는 폴로 광고나 1888년 이래로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훌륭한 젊은이를 양성해 낸다는 슬로건은 그가 볼때 웃기지도 않은 말도 안되는 사기며 기만이었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에의 특정 학군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지역적 기현상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마치 이 학군의 학교들이 우수한 커리큘럼과 실력있는 교사들로 명문대학의 입학을 보증하는 자질을 갖춘 곳이라는 환상과 오류에 빠져 있는 한국 사회를 보는 것 같다. 실제 이 당시 학생들은 일찍 성에 눈을 떠서 공부보다는 연애에 더 몰입하고, 흡연과 알콜과 마약에 빠져 있었고, 학교는 거액의 기부금을 쾌척한 장의사에게 기숙사의 이름을 붙혀주고 학생들로 하여금 그의 가공의 성공담을 듣게 하는 강요가 가해졌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과 집의 쳇바퀴 사이에 구겨 넣고, 창의성이 말살된 공부하는 기계로, 또 스스로의 생각과 사고는 정지된 채 부모의 의지에만 순응하는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지.. 또 아이들을 이렇게 꼭두각시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오히려 자랑하는 집단 광기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자성하게 된다. 갈곳없던 홀든에게 선뜻 하룻밤을 재워준다고 하고 잠든 홀든의 머리를 애무하여 동성애 의혹을 산 앤톨리니 선생은 의미있는 말을 남긴다. “교육받고 학식이 있는 높은 사람만이 세상에 가치있는 공헌을 한다는 건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재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냥 재능있고 창조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훨씬 가치있는 기록을 남기기 쉽다는 거지. 불행히도 이런 사람들은 많지 않아. 이들은 보다 분명하게 의견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거기에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학식이 없는 사상가들보다 겸손하다는 걸 들 수 있어..” 그 이전에 앤톨리니 선생은 교육과 배움을 통해 알게 되는 것들은 값지고 귀한 것이며 또한 이것이 타자에게 전해짐으로 지식이 동시대에, 나아가 후세에 전수되는 과정을 아름다운 상호 원조로, 한층 나아가 역사와 시인으로 묘사한다. 이 부분은 너무나도 공감이 되는 대목으로 저자는 홀든의 침묵을 통해 독자의 동의를 구하려 한 것 같다. 가지고 있는 재능과 창조력이 교육과 학식에 의해 더욱 빛이나고 겸손해 질 수 있다면 공부와 학습에 대한 나이 제한을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비록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세계 문학 전집을 읽으며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하고 고전이 주는 따뜻한 느낌에 젖어 보는 것이 뜻밖에도 후대를 위한 역사가와 시인의 역할을 담당하는 숭고한 행위일 수 있다는 (동성애자) 앤톨리니 선생의 가르침에 의미를 부여해 본다.